<뉴스와 시각>어느 정권 실세의 ‘언어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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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선 문화부 선임기자

‘당신은 겨울꽃 눈 내리는／절세의 어느 모퉁이에서 ／고고하게 홀로 피고 말거야.’ 박범신 작가가 양정철 민주정책연구원장에게 보낸 시의 한 대목이다. 때는 2017년 5월이었다. 문재인 대선캠프 팀장으로 선거 승리에 기여한 양 원장이 일절 공직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표명한 직후였다. 박 작가는 양 원장이 존경하는 작가로, 바로 그 전해에 대선 출마설이 돌던 문재인 전 의원 등과 함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함께 한 인연이 있었다. 그로 인해 박 작가가 친문 인사가 아니냐는 구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명박, 손학규 등의 정치인과도 가까이 지내는 문화계 거물이다. 박 작가의 시는 “잊힐 권리를 허락해달라”며 떠나는 실세의 용기를 칭찬하고 싶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런 격려를 받으며 떠난 양정철은 2018년 1월 책 ‘세상을 바꾸는 언어’를 펴냈다. 공존·평등·배려·존중의 언어를 통해 생활 속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내용이다. 글은 쉬우면서도 울림이 컸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할 때 스스로 강성 이미지를 초래한 ‘권력 언어’ 성찰은 진정성이 있었다.

노 정부를 취재하던 시절, ‘양비’로 불리던 그가 아리랑TV에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해 담당 관료를 어떤 언사로 압박했는지 그 관료에게서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또 언론재단 이사장에 친정부 인사를 앉히려 재단 이사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도 당시 이사로부터 들었다. 그런 양비의 전비(前非)들을 다 묻고 싶을 만큼 책 내용이 좋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읽어 보라고 권했다. 좋은 작가가 탄생했다며.

그게 미욱한 짓이 됐다. 책 출간 후 1년이 겨우 지났는데, 그가 정계에 복귀해 실세 바람을 여기저기 일으키고 다니는 탓이다. 대통령 복심으로 알려진 인물이 국가정보원장, 서울중앙지검장과 회동했는데 그저 개인적 만남이란다. 국내외 광폭 행보가 자기편 선거 승리를 위한 것임을 세상이 다 아는데, 그는 “무슨 근거를 갖고 그러느냐”며 게정을 부린다. 그토록 떠받든다는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작태다.

그는 책 서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에게 정치하지 말고 국민 의식을 바꾸는 책을 쓰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 유지를 받들겠다며 마지막 쪽엔 이렇게 썼다. “정권 교체로 여한이 없다. …이제 나는 권력의 힘, 돈의 힘보다 언어의 힘이 강한 사회를 꿈꾼다.”

그의 말을 믿었던 이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는 어쩔 수 없구나. 정치가 국민을 편 갈라 놓았는데, 민주주의 진보를 위한다는 자들이 자기편 권력 연장을 위해 어떤 짓이라도 하니.’ 양정철은 이렇게 정치 냉소주의를 키우고 있다. 정권 연장을 위해 그가 얼마나 기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스스로 주창한 민주주의 언어문화는 뒤로 돌려놓는 인물이 됐다. 민주주의는 신뢰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에게 앞으로 정책연구원장 본연의 일만 하라는 것은 순진한 주문이다. 그러나 그가 민주주의 미래를 진실로 중시한다면, 그 순진한 주문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문학계 중견인 이오장 시인은 최근 ‘양정철’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다. “기둥이 무대 위에 오르면／무대가 무너져 관중이 놀라지／나서지 말고 기둥으로 지켜라.”

jeij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