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의 도시산책>동네 명소된 문학관… “그쪽 아니여” 어르신들의 詩같은 가르침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수영문학관 안에서 밖을 내다본 풍경. ‘눈’빛이 그리운 창밖으로 시원한 ‘풀’빛이 보인다.

(5)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가는길

우뚝 솟은 도봉산 아래 마을
서울과 사뭇 달라 소읍 온듯
마을버스 길따라 어슬렁대니
내 가는곳 어떻게 알고 ‘안내’

한쪽 놓여있는 근사한 테이블
요즘 보기힘든 친필원고 수북
온몸으로 쓴 글, 쩌렁쩌렁 울려
“자기 죄에 대해 몸부림 쳐야”

좀처럼 발길을 할 일이 없는 도봉구 쌍문역 2번 출구에 있는 장소에서 약속이 생기자마자 “앗!”하는 탄성이 나왔다. 거기서 마을버스를 타고 십여 분을 가면, 김수영문학관(도봉구 해등로 32길)이 있다. 개관(2013년) 때부터 가려고 했지만, 아직도 발걸음을 하지 못한 곳. 당장이라도 달려갈 것처럼 길을 검색한 적도 있건만, 산책을 즐기는 자의 발길은 걸을 수 있는 반경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드디어 죽어서도 강한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시인 김수영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서울 도봉구 산 107-2번지는 김수영 시인의 본적지이다. 그의 묘도 시비도 도봉산에 있다. 언젠가 김수영의 궤적을 제대로 한번 좇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했을 때 ‘외딴집’이라는 작은 간판을 단 허름한 집이 그 번지에 있었다. 경매에 나와 있는 집이었다. 집은 낡고 초라했지만, 땅이 엄청 넓었기 때문에 옛날 그의 부인이 생계를 위해 양계장을 했던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니 김수영은 종로구 관철동에서 태어났고, 양계장은 서강에 있었다.

도봉구 방학동, 우뚝 솟은 도봉산 아래 마을은 서울에 속해 있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라 마치 소읍에 온 듯하다. 이따금 나타나는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마주치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길을 재촉하라는 듯 김수영문학관을 찾느냐고 묻는다. 아파트 담장 사이로 난 좁게 굽은 길로 방향을 트는 내게 한 할머니가 “거기가 아니야! 저쪽이야!”라고 외친다. 할머니들은 어떻게 어슬렁거리는 나의 최종 목적지를 꿰고 있는 것일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김수영문학관 전경.

명소가 된 문학관에는 김수영의 친필 원고가 꽤 소장되어 있다. 모두 워드로 작업하는 현재의 문인들이 세상을 떠난 뒤엔 쉽게 볼 수 없는 생생한 자료들이다. 필체를 보며 그 사람의 인품까지 상상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문인들은 일기도 워드로 써서 컴퓨터에 정리한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 중에 필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고인이 미처 다듬지 못한 채 남겨놓고 간 글을 어느 정도는 수정·보완해줄 수도 있고, 악의를 가지면 감쪽같이 없애버릴 수도 있다.

문학관엔 김수영이 즐겨 앉았다는 테이블이 한쪽에 놓여 있다. 시대를 감안하면, 무척 근사해 보인다.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세속의 상징물인 ‘돈’을 거침없이 시적 모티브로 삼았던 김수영이 자신의 가난을 자주 토로했음을 상기하자, 역시 가난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상대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김수영은 시를 통해 자유를 꿈꾸며 세상을 바꾸려고 했고, 그 때문에 수없이 좌절했던 시인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시를 통해 전율한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풀이 눕는다”로 시작되는 확고부동한 그의 대표작 ‘풀’을 쓰고 난 직후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더 살았다면, 같은 시대를 살며 언어의 미학을 추구한 김춘수 같은 시인을 점점 존중하며, ‘풀’이 전환점이 된 변화된 시 세계를 이어갔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문인들이 사석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시인은 산문을 잘 쓰지 못한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글쓴이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산문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위험한 글쓰기라고 할 수도 있다. 나는 최근 이름을 알린 몇 권의 산문집을 읽었는데, 그들이 그 책을 입으로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김수영이 ‘온몸’으로 쓴 글들은 사후 5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젊다.

그의 필체를 보니, 지금이야말로 혁명의 시기를 살았던 그의 시적 목소리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뭔가를 주장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무수히 인용하며 그 뒤에 숨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은 언제부턴가 모험이 되고 말았다. 문득 시단의 한 친구와 나눴던 어느 날의 대화가 생각난다. 문단의 한 대선배가 베스트셀러 작가랍시고 무례하게 구는 까마득한 후배를 여러 번 묵인하는 것을 보았던 내가 어느 날 그 친구에게 말했다. “왜 대선배님께서 그때그때 따끔하게 걔를 나무라지 않는지 모르겠어”라고. 그때 내 귀에 들린 말은 놀라웠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똥바가지를 뒤집어쓸 일이 있냐”였으니. 하지만 같은 자리에 김수영 시인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도 같다. 한 유족의 말대로 “그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시인”이었지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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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인도 그렇고 건강한 사회도 그렇고 적어도 자기의 죄에 대해 몸부림은 쳐야 한다. 몸부림은 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다.”(‘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진중한 자들부터 점점 입을 꾹 닫게 되는 이 현실 속에서 제정신을 가진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날들을 꿈꿔 본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누군가로부터 따끔하게 잘못을 지적받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방향 감각을 잃고 걷다 몸을 기댄 어느 모퉁이 담벼락에서 나를 삶으로 이끄는 묵직한 경보음을 듣는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