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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9년 08월 09일(金)
젊은 세대의 도발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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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진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한강의 기적’ 만든 저력의 나라
목숨 건 투쟁으로 민주화 이뤄

K- 팝, 전세계 젊은이 사로잡지만
미래에도 인기 지속될지는 미지수

기존 가치에 저항, 새로운 세계 열
혁명적 시도 그 어느 때보다 필요


무더위가 기승이라 밤잠을 설치는 요즘이다. 갈수록 잠들기도 힘든데 무더위까지 가세하니 더더욱 여름밤은 길기만 하다. 이 무덥고 긴 밤을 어찌 보낼까 고심하다 흘러간 옛 영화를 보면서 만족하는 길을 찾았다. 왜 신작 영화가 아니고 옛 영화냐 하면, 잠잘 밤에 머리를 많이 쓰게 하는 자극들은 피곤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이미 접했던 장면을 반쯤 마음을 비우고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편안한 즐거움에 빠져든다.

이렇게 최근에 본 옛 영화들 가운데 더스틴 호프먼 주연의 ‘졸업’이 길고 멋진 여운을 선사했다. 호프먼의 뛰어난 연기와 마이크 니컬슨 감독의 신선한 연출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인정받고, 니컬슨은 그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명문대 졸업생이 집으로 돌아와 이웃집 중년 여인과 불륜 관계를 맺고 그녀의 딸과 사랑에 빠져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장의 신부를 납치하듯 데리고 나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언뜻 보기에 다소 파격적인 청춘 로맨스 영화로 보이나, 기성세대의 위선, 권태, 경직된 태도에 숨 막혀 하는 젊은이의 시각이 비판적으로 펼쳐진 멋진 영화였다. 특히, 매일 놀고만 지내는 아들을 향한 ‘도대체 뭐 하는 거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그냥 부유하는 중’이라고 무심하게 대답하는 호프먼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신부를 데리고 나오며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교회의 십자가를 휘두르고 그 십자가로 문을 막아버리는 장면에서는 그 풍자적 유머에 웃음이 빵 터졌다. 십자가를 더 이상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기성세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대항의 무기로 사용한 듯한 이 장면은 무더위에 짜증 난 기성세대 아줌마의 권태마저 통쾌하게 날려 버렸다. 젊은 시절에 이 영화를 접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동이라, 왜 예전에는 이런 메시지들을 깨닫지 못했는지 아쉽기도 했다. 영화 내내 흐르던 사이먼&가펑클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흥얼거리며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에 깨어나서도 여전히 ‘졸업’의 장면과 음악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며 젊은 날의 나와 요즘 젊은이인 내 아들이 함께 떠올랐다. 왜일까?

명화 ‘졸업’의 배경이 된 미국은 현재 군사적·경제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라다. 최근에 다소 힘이 빠지면서 경쟁국들을 몰아세우고는 있으나, 여전히 발전 잠재력은 최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직접 경험한 미국은 1990년대 중반에 유학하던 동안 접했던 동료와 교수, 그리고 관련 학문과 마음의 고통이 심한 아이들을 위한 사회제도를 통해서였다. 한국에서 정신건강의학과와 소아정신의학과 수련을 모두 마치고 간 내게는 너무나 놀라운 세상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행동 문제를 보이면 야단을 치거나 억지로 훈육을 시키는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미국에서는 산만한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두뇌 발달, 심리 발달, DNA 등의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가장 효율적인 치료를 제공하고 이를 위한 사회제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국은 지금도 아이들 행동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비가 거의 없고, 치료와 교육을 담당하는 보건복지부와 교육부조차도 제대로 된 협력 시스템이 부족하다. 무엇이 미국과 우리를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는 것일까? 여러 요인 가운데 나는 오늘의 미국 사회에 만연한 혁신적 가치와 이를 가능하게 한 ‘졸업’의 주인공 같은 젊은이들의 반항심이 만들어 낸 것으로 본다.

한때는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오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구태의연하고 억압적인 구세대의 낡은 가치에 저항하고 뒤집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미국은 1960년대 히피 문화, 반전(反戰)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 구태의연한 사회 가치를 향한 도전과 항쟁이 열병처럼 퍼져 나갔다. 이를 수용한 결과, 자유주의, 혁신과 실용을 앞세우는 기업 문화, 근거 중심의 학문 발전 등 오늘의 미국을 강하게 만든 토대가 마련된 것이리라.

우리 대한민국도 미국과는 다른 우리만의 배경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르게 가난에서 벗어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나라다. 그리고 1980년대 독재에 맞선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자력으로 민주화를 이룬 대단한 저력을 가진 나라다. 또 개인보다는 대가족 단위의 집단을 중시하는 전통문화가 승화돼 개성 넘치는 집단 안무와 합창이 어우러진 K-팝으로 전 세계 젊은이를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역사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이 회의적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는 혁신보다는 기득권 혹은 과거의 성공담에 머무르고 있거나 심지어 예전에 넘치던 활기와 열정마저 식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이 ‘졸업’의 벤처럼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려는 혁명적 시도를 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변하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아 망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기존의 낡은 틀을 부수기 위해서는 구세대의 도움과 양보가 필수적이다. 교육 시스템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도록, 혁신 기업이 실패해도 개인을 벌하지 않고 회생의 기회를 주도록, 젊은이들의 시도가 어설퍼 보여도 비난보다는 따스한 위로와 충고를 주도록 우리 기성세대가 노력해야 한다. 비록 기성세대에 좀 불리하더라도 미래 세대의 도전이 가능한 정치·사회 제도를 만들도록 통 큰 양보도 서둘러야 한다. 젊은 세대가 곧 우리의 자녀·손주 그리고 미래이지 않은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불안과 고통을 감수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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