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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명작의 공간 게재 일자 : 2019년 08월 30일(金)
곤궁했던 하꼬방서 쥐어짠 ‘장미빛’에 대한 아픈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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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미빛 인생’ 촬영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1980년대 가리봉동은 일명 ‘벌집’으로 불리던 좁은 월세방과 싸구려 술집, 구멍가게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외곽층’으로 불리는 조선족의 터전으로 변해 있으며 여전히 영세민들의 주거지역으로도 불린다. 곽성호 기자 tray92@

영화 ‘장미빛 인생’ 가리봉동 (끝)

산업화 신화 희생지 구로공단
거기 기생하던 술집과 주먹들
하류층 사람들 환락가로 인식
과거도 현재도 따지지않는 곳

1994년 제작한 김홍준 감독
처참한 모습 노출 주저했는지
주먹· 마담·수배자· 불순분자
가리봉동 만화방 배경에 풀어

“장미빛 인생, 아직 안왔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몰라”


술집 무대에서 어우동 스트립쇼를 하며 살아가는 미영은 동네 깡패 황동팔(최재성)에게 근사하게 술 한잔 산다고 하면서 되레 자기가 잔뜩 취하고 만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골목길 끝. 동팔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간신히 집으로 데려오는데 여자는 동팔이 자신의 첫사랑이었다며 얼굴을 부빈다. 그리고 동팔에게 열쇠를 주며 말한다. “다 왔어, 오빠. 여기야. 나 이렇게 살아.” 동팔은 문을 따고 여자를 들여보낸 후 그를 뿌리치고 나온다. 그런 그의 등을 향해 여자는 자신이 사는 꼴 때문에 그러느냐며 울부짖는다. 근데 그게 어우동 한복을 벗으며 알몸을 보여주는 직업의 여자라서 싫으냐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사는 집이 이렇게 허름한 판잣집 수준이라서 그러냐는 건지 좀 헷갈린다. 아무래도 여자는 자신이 사는 곳을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  영화 ‘장미빛 인생’의 한 장면

과거는 왜 그리도 곤궁했는지, 예전을 그린 영화, 기껏해야 1987년을 배경으로 한 ‘장미빛 인생’만 보더라도 그 비루함과 눅눅함이 온몸을 찝찝하게 한다. 30년이 갓 지났음에도 한국에 살던 사람들의 삶은 간신히 ‘하꼬방’을 면한 수준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당시 가리봉동이라면 더욱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뤄낸 산업화의 신화는 영등포 남단의 몇몇 지구(地區)에서 만들어진 희생과 그 그늘이 바탕이 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구로공단이라 불리던 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는데 가리봉동이야말로 당시 그곳 공단의 여공들과 그 주변 인물들, 거기에 기생해 살아가는 술집과 숱한 구멍가게들, 또 일명 ‘벌집’으로 불리던 월세방들로 가득 차 있던 곳이다. 17살짜리 여공들은 가리봉동에서 일당 600원을 받으며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14시간을 일해 한 달에 겨우 2만2000원을 벌어 살아갔다. 그러다 보니 티켓 다방과 싸구려 술집으로의 ‘전직’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에 따라 하층계급 남자들은 욕망을 풀기 위해 부나방처럼 낮이나 밤이나 이곳을 기웃거렸다. 가리봉동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소득층 사람들의 환락가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단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듯했던 이곳이 지금은 우리 사회의 ‘외곽층’으로 불리는 조선족의 터전으로 변해 있으며 여전히 서민과 영세민들의 주거지역으로 불린다. 어쨌든 1980년대 후반이라면 더욱더, 모여 사는 남녀 모두 다 기막힌 사연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터였고, 과거를 묻지도 않고 현재의 삶을 따지지도 않는 탓에 전과자와 수배자, 위장취업자들이 뒤섞여 사는데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었던 아이러니한 공간이기도 했다.

김홍준 감독이 1994년에 만든 이 영화는 가리봉동의 처참한 모습을 한꺼번에 노출시키거나 시원하게 속을 드러내는 데는 다소 주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마담’이라 불리는 한 여자(최명길)의 만화방에서 벌어진다. 동팔이 마담을 강간하는 곳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결국 함께 어설픈 미래를 꿈꾸게 되는 곳도, 대학생이자 위장취업자로 반정부 운동을 하는 마담의 동생(차광수)이 수배를 피해 숨어드는 곳도, 무협지를 썼다가 불순분자로 몰려 말이 총무지 불목하니로 일하는 유약한 남자 유진(이지형)이 기대 살아가는 곳도 바로 여기 만화방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늘 가리봉동의 골목길로 슬금슬금 기어나갔다가 다시 이 지하의 만화 가게로 숨어들기를 반복한다. 그 우유부단한 시점 쇼트에는 당시 세상 밖으로 쉽게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의 불편한 심기가 묻어 나온다. 만화방의 좁은 공간을 통해 격렬한 변화가 전개되고 있는 넓은 세상 밖을 상상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기이하게도 가리봉동의 답답하면서도 졸렬한 공기(空氣)가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 작은 공간의 잠망경을 통해 가리봉동 전체를 느껴지게 한다는 것인데, 그건 곧 소소하고 구차한 이들 남녀의 뒤엉킨 삶이 사실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작은 우주는 오히려 늘 큰 우주를 담고 있는 법이고, 일상의 구체성이 전체의 보편적 삶을 반영해 낸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어법이다.

김 감독이 왜 영화 제목을 ‘장미빛 인생’으로 정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 제목은 전설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 곡명이다. 노래 가사는 사랑의 밀어를 그려낸 것이고 제목인 ‘라 비 앙 로즈(장미빛 인생)’는 여자가 남자 품에 안길 때 장미빛을 보고 느낀다는 다소 한가한 의미를 담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그토록 오랜 기간 불리고 사랑을 받는 까닭은 그걸 부르는 피아프의 다분히 처연한 음색 때문일 것이다. 장미빛 인생이란 결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 그건 숙원일 뿐이라는 숙연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김 감독이 영화를 통해 진단을 내린 당시의 세상도 피아프의 음색과 비슷할 것이다. 1987년을 경유해 간신히 1994년까지 온 한국의 사회 환경에서 그 누구도 장미빛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의 진짜 삶에서는, 장미빛으로 채색되는 인생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를 반어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장미빛이 아니냐 하면 그게 꼭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이 제목이 지닌 묘법이다. 영화는 어쩌면 그것 자체가, 그 모든 것이 장미빛임을, 우리가 그동안 장미빛이라고 하는 것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아픈 자각의 바늘을 찔러 댄다.

서서히 모든 관계가 파국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 마담의 대사가 이를 보여준다. 마담의 동생은 이제 체포 직전이고 동팔은 공안 형사로부터 동생을 넘겨 주면 살인죄를 면해 준다는 밀약을 받기에 이른다. 동팔은 여자의 동생과 함께 마담을 떠나려고 결심한다. 마담은 만화방 건물의 꾀죄죄한 옥상에서 그 옥상만큼 남루한 가리봉동 동네 전경을 내려다보며 이윽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 깡패 동팔, 자신도 사랑하게 된 깡패 동팔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할 수만 있으면 여길 뜨고 싶었는데 난 남고 다들 떠나네요. 하지만 난 안가. 단속 피해 여기서 B자 비디오 틀고 노가다 아저씨들과 소주 까고 살 거야. 이제 알았어. 내가 그 사람들이라는 거. 갈 사람 가요. 다 잊을 거야. 어디서 뭘 하고 먹고 살까 생각도 안 할 거야. 잘난 주먹 자랑하다가 얻어맞고 있을지, 참한 여자 만나 착실하게 살다가 가끔 옛날 만화방에서 만난 마담 생각할지.”

영화는 이쯤 되면 가슴속으로 철철 울게 한다. 1980년대 엄혹한 시대에도 러브스토리가 존재했으며, 따라서 무릇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연애처럼 이뤄내야 한다는 삶의 진리를 불현듯 깨닫게 한다. 장미빛 인생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라는 것이다. B자 비디오 틀고 노가다 아저씨들하고 소주 까는 인생. 그 삶을 직시하는 인생.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깨달음으로 영화는 마음속 칸칸이 등불을 켜게 한다.

남자가 떠나간 후에도 가리봉동 만화방 TV에서는 한동안 독재자 전두환의 개헌을 거부하는 담화가 계속해서 뉴스로 나왔을 것이다. 만화방 밖 거리도 줄곧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마담의 만화방에는 밤마다 치사스럽고 아둔한 삶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 가리봉동 골목길, 그 거리의 삶은 여전히 빈궁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곳의 만화방에는 여관에도 갈 수 없었던 인생들, 막장의 인생들이 단돈 1000원을 들고 밤을 지새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이상한 위안이 존재했던 곳, 만화를 통해 잠시나마 만화 같은 희망을 꿈꾸게 했던 곳, 그럼으로써 장미빛 인생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 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3번 출구로 나가 가리봉시장으로 가는 사거리 한복판에 서면 구석에 남아 있는 만화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에 아직 마담이 있을까. 시대의 변방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삶의 흔적이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있을까. 아마도 아주 약간의 자국만 남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한 듯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세상은 좋아진 듯 좋아지지 않았으며 앞으로 나아간 듯 뒤로 후퇴했기 때문이다. 장미빛 인생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그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장미빛 인생’을 보면 자꾸 서글퍼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mail 곽성호 기자 / 사진부 / 차장 곽성호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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