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 ‘노파에게 아름다움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시간’, 캔버스에 유채, 135.5×96.5㎝, 1746년.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 전준엽이 만난 美感의 세계 - ⑮ 회화 속 ‘시간’의 모습
- 서양미술사
회화속 시간, 17세기경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있는 노인의 모습으로 첫 표현
젊은 여인의 아름다움-노파의 추한 몰골 대조… 시간이 지닌 영원불변의 힘 나타내
시간을 느끼는 것은 상대적이다.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시간이라도 사람들의 감성 속도는 각기 다르다. 속도는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과거-현재-미래로의 진행. 이런 시간의 속성을 회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시간을 다룬 작품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서양미술에서 시간은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중세부터 의인화된 시간이 그림에 등장했지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17세기쯤이다. 등에 날개가 있고 낫과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꼬부랑 노인의 모습이다.
18세기 로마에서 활동했던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1708∼1787)가 보여주는 시간은 교훈적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노파에게 아름다움을 파괴하라고 명령하는 시간’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시간에 의해 파괴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 삶을 우화적으로 그려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윌리엄 다이스 ‘페그웰 만:1858년 10월 5일의 추억’, 캔버스에 유채, 200×250㎝, 1858∼1860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 소장
여기서 시간은 고약한 노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벗어진 흰머리와 천사의 상징인 날개가 있고, 모래시계를 들고 있다. 노인이지만 근육질의 건장한 모습이다. 시간이 지닌 영원불변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려는 의도다.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코드다. 탱탱한 피부와 복숭앗빛 살결, 팔등신의 우아한 몸매는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아름다움의 모습이다. 빛나는 청춘의 한때가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시간 앞에서는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노년을 상징하는 추한 몰골의 노파가 시간 영감의 명령에 따라 젊은 여인을 할퀴고 있다.
젊은 여인과 노파는 극심한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직접 연결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젊은 여인의 탐스러운 목덜미에 대비되는 주름진 쇄골이 흉하게 드러난 노파의 어깨, 포동포동 물이 오른 여인의 얼굴은 빛을 마주 보고 있어 더욱 빛나고, 빛을 등진 쭈글쭈글한 노파의 얼굴은 음침하게 보인다. 그러나 젊은 여인과 노파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젊음을 잃고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들어서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드는 것이 시간의 임무인 것이다.
작가의 이런 생각은 세 인물을 연결 고리처럼 엮어 놓은 구성으로 나타난다. 여인의 얼굴에서부터 오른쪽 어깨로 흐르는 시선은 팔을 타고 내려와 시간 영감의 왼팔과 어깨로 이어지며, 날개를 지나 노파의 어깨와 얼굴 그리고 쭉 뻗은 팔에 의해 원을 이루게 된다. 마치 서로 손잡고 춤추듯 이들을 결합시키고 있다.
바토니가 본 시간은 교훈적 얼굴이다. 신화적 알레고리를 통해 삶의 덧없음과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에 비해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가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가 보는 시간은 명상적이다. 그는 일출이나 일몰 같은 절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치에 인생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생의 단계들’이란 제목의 작품에서도 풍경을 통해 흘러간 시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년 작으로 인생의 황혼기에서 그동안 살아온 날을 돌아보려는 심정을 담았다. 일몰의 바닷가인데 작가의 고향인 발트 해의 작은 항구 그라이프스발트를 기반으로 상상 속 장소로 재구성했다.
화면 맨 앞쪽에서 뒷모습만 보여주는 인물이 만년의 작가 자신이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 보겠다는 의도를 보여준다. 모자 쓴 중년의 남자는 작가의 조카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는 이 남자는 인생의 성숙기를 상징하는 코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인생의 단계들’, 캔버스에 유채, 73×94㎝, 1835년. 라이프치히 조형예술미술관 소장
우아하게 앉아있는 젊은 여자는 작가의 딸이며, 청년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스웨덴 국기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아마도 작가의 손자나 손녀로 보이는데,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노년기의 작가가 바라본 과거의 시간들이다. 따라서 작가의 위치(뒷모습의 노인)인 현재에서부터 장년기, 청년기, 유년기의 인물을 따라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원근법으로 시간의 역류를 표현한 셈이다.
인생의 회고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림 정중앙에 배치된 범선이 가장 크고 또렷한데, 인생의 절정기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그 앞의 작은 배 두 척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그리고 수평선에 걸려 있는 배는 장년기를, 그 너머로 돛만 아스라이 보이는 배는 노년기를 상징하는 코드로 보인다.
배가 떠 있는 바다는 시간을 뜻한다. 해변으로부터 시작한 항해는 수평선을 넘어가면서 시야를 벗어날 것이다. 인생의 흐름도 그와 같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는 항해처럼 죽음을 향한 항해가 삶이라는 모순을 작가 나이쯤(프리드리히는 61세에 이 그림을 그렸다) 되면 이해할 수 있으려나.
이 그림에는 두 개의 상반된 시간이 나타나 있다.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의 시간, 즉 작가의 회상이다. 또 하나는 현재로부터 미래로 나아가는 정상적 시간이다. 회상은 마음속으로 되짚어가는 심리적 시간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물리적 시간이다. 그림 속에서 심리적 시간과 물리적 시간이 만나는 지점은 해변이다.
작가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현실 장면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심리적 풍경이 되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프리드리히는 해변에서 석양을 즐기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고, 이렇게 보이는 것과 생각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결합해 바로 이런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
일몰에서 우리가 느끼는 건 숙연함과 명상적 분위기다. 이 그림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고즈넉하다 못해 종교적 장엄함까지 보인다. 인생에 대한 성찰을 그리려는 의도를 담은 풍경이니 당연한 것일 게다. 그런 느낌을 프리드리히는 정교하게 계산된 구성으로 담아 시간의 여러 얼굴로 보여준다.
인상주의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할 때 활동한 영국 작가 윌리엄 다이스(1806∼1864)도 시간을 주제로 한 걸작을 남겼다. ‘페그웰 만: 1858년 10월 5일의 추억’이란 작품인데, 이 그림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시간의 변주곡’ 정도가 어울릴 듯 하다. 여기에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성격의 시간이 나타나 있다.
첫째는 작가가 살고 있는 ‘지금’이다. 이는 인간이 점유한 구체적 시간이다.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 정상적 흐름 속 시간이다. 바로 이 그림에 나타난 시간이기도 하다.
다이스는 영국 어촌 마을인 페그웰 만의 가을 저녁무렵을 그리고 있다. 막 해가 떨어진 황혼의 해변에는 썰물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돈다. 전경에 스냅 사진처럼 배치한 네 명의 인물은 작가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처제들이다. 오른쪽 절벽 아래에는 다이스 자신도 그려 넣었다.
그런데 작가는 시간을 묘사하는 순간으로 왜 이처럼 쓸쓸한 가을 저녁을 택했을까. 그것은 그림 중앙 위에 그려 넣은 혜성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별은 1858년 6월 2일 처음 관측된 도나티 혜성이다. 이 혜성은 작가가 제목으로 쓴 ‘1858년 10월 5일’에 육안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밝게 빛났다고 한다. 도나티 혜성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천문학적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달려와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별들이 속한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법칙 속에 있다. 이를테면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우리는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중 300광년 떨어진 별을 보고 있다고 치자. 우리 눈에 들어온 그 별이 지금 이 순간 그 자리에 있을까.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300년 전의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의 시간으로 별을 재단하면 허무할 뿐이다. 인간의 시간으로 3958년을 주기로 궤도를 도는 도나티 혜성의 시간도 그런 법칙 속에 있다. 그림 속에서 천문학적 시간은 혜성이 떠 있는 저녁 빛의 하늘이다. 혜성이나 구름의 움직임을 느낄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지구의 자전을 느끼지 못하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것처럼.
황혼의 하늘 덕분에 선명하게 보이는 절벽은 지구의 나이를 보여준다. 켜켜이 쌓인 지층은 최소 2억5000만 년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지질학적 시간’이다. 지질학적 시간은 절벽의 지층처럼 굳어 있다. 시간의 초침 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시간과는 너무도 다른 감정을 준다.
다이스는 천문학, 지질학적 시간의 장구함과 생소함이 한 자리에 만나는 짧은 순간의 감동을 그림 속에 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지층이 드러난 흰 절벽이 있는 페그웰 해변을 선택했다. 때마침 물이 빠져나가는 시간이었기에 작가의 의도가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화가·미술저술가
■ 작가설명
폼페오 지롤라모 바토니 (Pompeo Girolamo Batoni)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화가.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작가가 그렇듯 그리스와 로마의 그림과 조각에 심취했으며, 산그레고리오 성당과 산체르소 성당의 제단화를 그려 명성을 얻었다. 이후 1740년쯤에 ‘막달라 마리아’ ‘메레아그로스의 죽음’(1740∼1743), 베를린미술관의 ‘푸시케의 결혼’(1756) 등을 고전주의 기법의 화려한 필치로 그려 당시 로마에 있던 독일화가 라파엘로, 멘구스 등과 함께 신고전주의 흐름을 이끈 대가로 평가되고 있다.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Casper David Friedrich)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 가족들의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의 영향 때문인지 프리드리히는 안개나 눈, 일몰, 달밤 등 어둡고 우울한 모습을 풍경화에 담아 짙은 종교색을 표현했다.
윌리엄 다이스(William Dyce)
인상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기에 활동한 영국 작가로 시간을 주제로 한 걸작을 많이 남겼다. 런던의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 회화에 관심을 가져 1825년 이탈리아에 갔다. 귀국 후 에든버러에서 살며 독일 나자레파의 화풍을 전했다. 미술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쏟아, 1840년 서머싯하우스에 신설된 미술학교장이 되어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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