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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Interview 도전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06일(金)
“女 최초 타이틀에 ‘책임감’… 변화 갈림길서 늘 어려운 쪽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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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승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

한국 첫 女조선공학박사
현대重硏 유일 女연구원
해양교통안전公 첫 이사장


어려서부터 바다·배 동경
스킨스쿠버·요트타기 취미
女불모지 조선 선형설계 전공

세계최고 기술력 현대重서
선박 설계 작업 흥미진진
꿈 꾸던 교단서 학생 가르치다
해양교통공단 공직 새 도전

내 뒤에 있을 후배들 위해
말·행동 하나하나 신중
조직 불합리 관행 개선하는
소통하는 리더 되고 싶다


1986년 겨울 부산. 4녀 1남을 둔 아버지는 고교 졸업을 앞둔 둘째 딸 손을 잡고 무작정 부산대를 찾았다. 조선해양공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은 먹었지만 호기심과 불안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딸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지도교수를 만난 딸은 전공과정 소개와 전망을 듣더니 결심을 굳혔다. ‘우리나라 첫 여성 조선공학 박사’ ‘현대중공업 연구소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연구원’ 등 지난 30여 년간 조선·해양 분야에서 여성 최초란 화려한 수식어를 휩쓸며 살아온 이연승(51)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초대 이사장 얘기다.

지난 8월 28일 세종시 해양교통안전공단 집무실에서 만난 이 이사장은 “어릴 때부터 수학·과학을 좋아하고 바다와 배에 대한 동경이 컸다”면서도 “30년 전만 해도 여학생이, 그것도 조선공학을 택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분이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수학·과학 경시대회 학교 대표 자리를 싹쓸이하다시피 한 딸에게 조선공학은 딱 맞는 전공이라고 봤다. “딸 많고 아들은 하나인 경상도 집안인데도 아버지는 한 번도 차별을 하지 않으셨어요. 딸들이 사회에 진출해 역할을 하기 바라셨지요. 늘 ‘닥치면 뭐든 잘해내는 아이가 바로 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셨고요.”

그는 조선공학 가운데서도 유체선형설계를 전공했다. 같은 힘으로도 파도의 영향은 덜 받으면서 속도는 더 나도록 선체의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선박설계의 핵심 분야다. “전공이 저에게 잘 맞았어요. 스킨스쿠버와 요트 타기가 취미일 정도로 바다와 배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시험공부 할 때 혼자 공식을 유도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스테판 티모셴코(러시아 출신의 공학자로 역학의 선구자로 불림)의 ‘재료역학’일 정도다. 이 이사장은 “대학에서 처음 접한 원서인데 내용이 명쾌해서 읽을 때 설렘을 느끼곤 했다”며 “이 책을 접한 뒤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조선공학이 당시 여성의 불모지이긴 했지만, 예상 밖으로 여성이 장점을 발휘하기 좋은 분야예요. 선형설계는 섬세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수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한 이 이사장은 대학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독일이 선박 설계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학비가 저렴해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었지요.”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첫 수업. 한 단어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독일어를 배워가긴 했는데 턱없이 실력이 부족하더라고요. 토론하고 질문하기는커녕 눈만 끔뻑이다가 수업을 마쳤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지요. 그때는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첫 학기가 ‘지옥’같이 느껴졌다는 이 이사장은 이를 악물고 견뎌냈고 한 학기가 지나자 조금씩 수업 내용이 귀에 들어오더니 한 단계, 두 단계 실력이 쌓여갔다.

교수가 되려면 실무경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무렵 마침 국내 대기업 연구소(현대중공업 선박해양연구소)에서 취업 제안이 왔다. “독일 베를린공대에서 학생 겸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현대중공업 등 우리나라 대기업 연구소와 프로젝트를 추진한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몇 달 끙끙대며 연구한 결과물이 나올 때 정말 기뻤지요. ‘내가 참 현장을 좋아하는구나’ 싶었어요. 민간 연구소로 간 것은 실무경력을 쌓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현장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따뜻한 울타리에서 벗어나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첫 사회생활인 셈이었는데 다른 사회초년생들처럼 ‘쓴 경험’도 많이 했지요.” 조선·해양 분야가 전통적으로 남성 중심 직군인 데다 당시만 해도 성인지 감수성이 발달하지 않아 회사 안팎으로 불편한 상황이 많았다. “그냥 엔지니어가 아니라 ‘여성 엔지니어’라는 표식이 저도 모르게 붙어 다녔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엔지니어와 다르게 대우받거나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미묘하게 강요되는 일이 많았어요. 예를 들어, 내가 설계한 선박인데 시운전은 남성 엔지니어가 하는 관행 때문에 나설 수가 없었지요.” ‘최초’ ‘여성’이란 수식어가 주는 부담감과 무게도 상당했다. “선임자가 없다 보니 제가 후배들이 가게 될 길을 닦아 놓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아끼던 ‘눈 덮인 벌판을 지날 때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시구가 있어요. 늘 마음에 품었지요. 말 하나, 행동 하나 조심스럽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실력으로 승부를 내기로 한 이 이사장은 이후 민간 업계에서 10년간 일에 푹 빠져 지냈고 실제로 성과도 많이 냈다. “일이 주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정말 컸어요. 선박유체설계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세계 최대, 최고의 선박을 설계하고 생산하는 현대중공업은 흥미진진 자체였습니다. 연료경제선형을 설계하는 이론 시스템을 만들고 해당 시스템을 바탕으로 우수 선형을 실제 설계하고 제작했던 경험은 지금 떠올려봐도 가슴 벅찹니다.”

▲  이연승(원안)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이 지난 2016년 홍익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제자들과 현대중공업을 견학한 모습. 이연승 이사장 제공

2010년. 이 이사장은 드디어 꿈꾸던 교직에 몸담게 된다. “학교(카이스트)에 가니 그간 공부했던 이론과 산업체에서 쌓은 기술 등 아이들에게 해줄 말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돌고 돌아온 길인데 오길 잘했다 싶더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제자들(홍익대)이 선박설계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일이다.

교수 7년 차던 2017년 말 이 이사장은 뜻밖의 전화를 받게 된다. 선박안전기술공단(해양교통안전공단의 전신) 이사장 공모에 응해보라는 제의였다.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고 실제 거절도 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참 즐거웠고 보람도 컸기 때문입니다. 또 평생 현장에서 일하고 가르치는 일만 했는데 내가 조직을 관리하고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죠.”

이 이사장은 결국 피하지 않기로 했다. “살다 보면 많은 변화와 도전 앞에 서게 됩니다. 받아들이느냐 피하느냐 갈림길에 놓이는 건데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은 해야 하죠. 그때마다 저는 더 어려운 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합니다. 변화가 도피처가 아닌 다음에야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험해 보니 익숙한 업무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찾아 매진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더 큰 기회가 눈앞에 찾아오고 성장하게 되더군요.”

이 이사장은 선박안전기술공단에서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의 대형상선 설계기술을 중소형 선박, 특히 소형 어선에 접목하고 싶었다. “공단 이사장직을 수락하게 된 것은 중소형 선박 기술 발전을 돕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습니다. 대형 선박과 달리 우리나라 중소형 선박 기술은 굉장히 낙후했고 기술력이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존의 우수한 대형 선박 시스템을 활용한다면 어선의 안전성과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요즘 이 이사장의 어깨는 더 무거워지고 도전 과제는 더 늘어났다. 지난 7월 선박안전기술공단이 해양교통안전공단으로 출범하며 조직이 확대·개편됐기 때문이다. 선박안전기술공단의 업무가 선박 검사 등에 국한됐다면 해양교통안전공단은 해양교통 전반을 종합관리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한다.

이 이사장은 “해양교통안전 통합데이터 플랫폼 구축, 스마트 해양교통안전센터 구축 등 출범과 함께 발굴한 30여 가지 신규 사업이 내년 이후에 본궤도에 오르도록 기반을 탄탄히 다질 것”이라며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도록 하는 한편 출범 10년 이내에 해양사고 50% 저감이란 목표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 조직을 이끄는 기관장이 된 지 1년 8개월. 이 이사장은 스스로를 어떤 리더라고 평가할까. “직원들의 말을 들어주고 불합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리더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던지는 메시지가 뭔지 파악해 해결해 주려다 보니 사람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어요. 소통이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공부도 하고 실제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의 말과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기도 합니다. 전문성도 키우고 인맥도 늘려서 추진력을 갖춘 리더가 되고 싶습니다. 해양교통안전공단 이사장으로서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의 요구사항을 귀담아듣고 실현해주고 싶어요.”

이 이사장이 공단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도 직원들의 숙소 에어컨 설치, 업무용 차량 보급 등 근무여건 개선이었다.

3년의 공공기관장 임무를 마치고 난 뒤 이 이사장은 또 어떤 도전에 나설까. “우선, 학교로 돌아가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정치에 뜻은 없는지 물었다. “어떤 형태로든 해양 종사자들의 효율성 제고, 수익창출, 안전강화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가치로 ‘인내’를 꼽은 이 이사장은 “누구나 어려운 상황을 한 번씩 맞닥뜨리게 되는데 어려움을 기회로 삼아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며 “인생의 후배들이 나에게 주어진 역경이 또 다른 한편으론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연승 이사장은

이연승 이사장은 지난 7월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학·석사)를 졸업했다. 독일 베를린공대대학원에서 교통기계시스템공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대학 선박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현대중공업 선박해양연구소 선임연구원, 대우조선해양 성능연구소 수석연구원을 거쳐 카이스트 연구부교수, 홍익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로 일했다. 2017년 12월 해양교통안전공단 전신인 선박안전기술공단 이사장에 올랐다.

현재 가족과 함께 세종시 조치원읍에 거주하고 있다. 친한 공공기관장으로 선박안전기술공단 이사장이 된 뒤 업무 교류가 많았던 박승기 해양환경공단 이사장, 조현배 해양경찰청장을 꼽는다. 외유내강형으로 강한 추진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재인 정부 2대 해양수산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박수진 기자 sujininva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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