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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16일(月)
여성에 대한 오만과 편견에 맞서 펜으로 독립을 쟁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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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커밍 제인’에서 제인(앤 해서웨이)은 톰(제임스 매커보이)을 만나서 얻은 영감으로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 윤성은의 스크린인물학 - (16) ‘비커밍 제인’과 제인 오스틴

- 영화 이야기

고요한 시골의 새벽에 글 쓰는 장면으로 시작… 그녀가 맞선 대상은 남성 아닌 잘못된 인습과 제도
사랑하는 톰과 이별 후 작가의 길로… 이 ‘첫사랑’의 경험을 소설 ‘오만과 편견’에 녹여내

“역시 제인 오스틴이야! 인생의 만병통치약이지!” <영화 ‘제인 오스틴 북 클럽’>
“증오·고통·두려움도 없이 항의·설교하는 법도 없이 글 쓰던 한 여자가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
“지난 1000년 최고 문학가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 <1999년 BBC 조사>


여섯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알레그라, 최근 반려견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떠나보낸 조슬린, 25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에게 배신당한 실비아, 자꾸만 어린 제자에게 눈길이 가는 유부녀 프루디는 우울한 일상에 변화를 주기 위해 북클럽을 만들기로 한다. 알레그라는 주립도서관에서 일하는 실비아에게 안 읽은 책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가 읽었던 책을 또 읽자고 제안한다. 프루디가 공통으로 읽었던 책이 뭔지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알레그라는 ‘오만과 편견’ ‘에마’ ‘설득’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이성과 감성’ 등의 소설을 열거하며 외친다. “역시 제인 오스틴이야! 인생의 만병통치약이지!”

‘제인 오스틴 북 클럽’(2007, 감독 로빈 스위코드, 이하 ‘북클럽’)의 다섯 여성과 한 남성은 한 달에 한 번,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을 가진다. 첫 작품 ‘에마’부터 멤버들은 각자 다양한 해석을 내놓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놀라울 것도 없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제인 오스틴이 창조해 낸 인물들과 많이 닮아 있으며, 그들과 비슷한 대사를 쏟아놓는다. 가령, ‘에마’의 발제를 맡은 조슬린은 커플 메이커 에마처럼 실비아와 청일점 ‘그릭’을 이어주려 애쓰는 인물이다. 그릭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니 어쩌면 무시한 채. 그렇게 이 영화에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 전체에 대한 오마주가 묻어난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책이 몇백 년 후에도 전 세계에서 애독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될 줄 알았을까? 적어도 소설 속 인물들이 19세기 말에 발명된 이상한 기계를 통해 스크린 위에서 빛으로 살아 움직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영화사를 관통하면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계속 영화화돼 왔는데, 그 작품들은 대개 ‘북클럽’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열렬한 구애 내지 팬레터로 느껴질 만큼 작가와 원작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결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21세기에도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성 역할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으나 여성과 남성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고 있으며, 상대가 누구든 인류의 사랑과 연애는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이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커밍 제인’(2007, 감독 줄리언 재롤드)은 약 200년 전 영원히 잠든 제인 오스틴을 깨워 그녀의 작품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 파고든다. 영화는 그녀가 썼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됐던 여성을 둘러싼 온갖 불합리한 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딸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없었던 시대였고, 여성은 결혼할 때 지참금을 내야 했으며, 결혼이 여성의 인생을 좌우하던 시절이었다. ‘비커밍 제인’에서 톰 리프로이에게 추근대는 제인의 어린 사촌 동생이나 ‘오만과 편견’에서 남성들의 관심을 끄는 데 거의 미쳐 있는 듯한 엘리자베스의 동생들, 노처녀에 대한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남자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는 친구 등은 당대의 사회상이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영화가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이들의 모습은 씁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제인은 톰과 사랑의 도주를 꾀하지만 결국 마음을 바꾼다.


‘비커밍 제인’은 이렇게 보수적인 시대에 남들과는 확실히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했던 제인 오스틴을 조명한다. 영화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골의 새벽에 ‘제인’(앤 해서웨이)이 글을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줄리언 재롤드 감독은 이 작품보다 2년 정도 앞서 나온 조 라이트 감독의 ‘오만과 편견’(2005)을 상당 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오만과 편견’의 첫 장면은 눈부시게 밝아오는 시골의 아침을 배경으로 책을 읽으며 집으로 들어오는 엘리자베스를 담고 있다. 첫 장면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 시골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주 비춰주는 것은 실제로 제인이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여성의 독서’ 또한 제인 오스틴의 인생과 소설에서 꽤 의미심장한 테마다. 여성에게 독서가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던 시기, 제인은 책 읽기를 권장하며 잘못된 사회적 편견을 깨나갈 것을 독려한다. 사후 출간된 ‘노생거 사원’은 독서와 작문에 대한 제인 오스틴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때문에 ‘비커밍 제인’에서 제인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성공한 여성 작가를 찾아가는 장면은 흥미롭다. 훗날 결혼이 아닌 펜으로 독립하게 되는 그녀에게 선배 작가와의 만남은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하게 된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 오스틴과 톰 리프로이의 실제 로맨스를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자존심이 센 제인은 런던에서 온 변호사, ‘톰 리프로이’(제임스 매커보이)가 자신의 글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자 처음에는 반감을 갖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문학에 조예가 깊고 남자다운 그에게 점차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만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의 이런 경험이 오랜 시간 후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 ‘첫사랑’에 반영됐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톰은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와 달리 여자를 좋아하고 부자도 아니지만, 제인에게 오만한 인물로 비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한편, 제인과 엘리자베스는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됐던 가치관과 예절의 껍데기를 조금씩 깨뜨리며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제인이 레이디 그리셤에게, 엘리자베스가 캐서린 공작부인에게 결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장면은 그녀들이 맞서는 대상이 남성이 아니라 잘못된 인습과 제도임을 표명한다. 제인은 톰과 이별한 후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녀의 경험과 달리 ‘오만과 편견’의 두 남녀 주인공은 해피 엔딩을 맞는다. 소설에서만이라도 제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을 함께 있도록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비커밍 제인’의 주인공은 제인 오스틴의 젊은 시절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영국 햄프셔주 스티브턴 지역의 교구 목사였던 조지 오스틴의 딸로 태어난 제인은 낮은 신분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넉넉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문학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언니 카산드라와 함께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당시로서는 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제인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어느 정도 교육받은 시골의 중산층’은 이런 그녀의 배경과 경험을 반영한다. 6남 2녀 중 일곱째였던 제인은 글 쓰는 것 외에도 춤과 파티를 좋아하는 등 외향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커밍 제인’에서는 어머니가 제인을 ‘파티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크리켓을 잘하는 이유가 오빠들과 함께 자랐기 때문이라는 대사도 나온다. 그러나 첫사랑의 상처가 컸기 때문일까. 제인 오스틴은 잘 알려진 대로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익명으로 책을 출간했다. ‘비커밍 제인’의 마지막 신은 대중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꺼렸던 제인 오스틴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제인 오스틴은 진부하고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진지하게 녹여 넣음으로써 대중들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일상의 세밀한 관찰에서 나오는 현장감, 인간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만들어낸 심리 묘사도 일품이거니와, 캐릭터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현실에 살아 숨 쉬는 인물로 승화시키는 재능은 후대의 작가들이 앙망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제인 오스틴은 1999년 BBC가 조사한 ‘지난 1000년간 최고의 문학가’라는 설문에서 셰익스피어에 이어 2위에 올랐고, 지난 2017년에는 엘리자베스 프라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함께 드물게 영국 지폐(10파운드)를 장식한 여성이 됐다. 버지니아 울프는 “증오도 고통도 두려움도 없이, 항의하는 법도 설교하는 법도 없이 글을 쓰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법이기도 했다”고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 경의를 표한 바 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자주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살았던 작가가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지탄받기도 했지만, 그녀의 소설들을 폄하할 빌미로는 부족하다. 제인 오스틴의 시선은 전쟁터보다 가까운 곳을 향하고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는 사람을 탐구하며, 사랑을 갈구하고, 연애의 기준과 결혼의 조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 그런 것처럼, 미래에도 누구나 한 번쯤은 제인 오스틴이 바라봤던 그 공간 안에 머물게 되지 않을까.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제인 오스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에 반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렇게 말한다. ‘북클럽’의 청일점, ‘그릭’처럼.

“제인 오스틴이 책을 더 많이 썼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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