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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철환의 음악동네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16일(月)
“라디오와 함께 살았었지”… 노래로 불러낸 잊고 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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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우리가 세상에…’

가을이 오면 그제야 기지개를 켜는 노래가 있다. 세월 따라 흘러간 ‘박물관식’ 노래가 아니라 계절 따라 흘러온 ‘갤러리형’ 노래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김상희 ‘코스모스 피어있는 길’ 중). 걷다보면 알게 된다. 가을이 언제나 걸음을 가볍게 해주진 않는다는 걸. 도리어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가을의 이면도 존재한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가슴 깊이 파고드는데/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스쳐가는 바람소리뿐’(백영규 ‘슬픈 계절에 만나요’ 중).

사직단 근처에 산 지 10년이 넘었다. 이곳 가을의 전령사는 코스모스와 귀뚜라미가 아니다. 학교 가는 길에 늘 마주치는 광화문글판이다. 9월이 시작되자 거기에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이 걸렸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중략)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벌레 먹은 나뭇잎은 3개월 동안 걸렸다가 겨울의 시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때쯤 나도 익은 가을을 보낼 예정이다.

처음부터 글판이 시로 채워진 건 아니었다. 1991년 1월 처음 걸린 글귀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경제 활력 다시 찾자’는 격문이었다. 대형건물에 걸렸던 계몽포스터를 낭만시구(詩句)로 바꾸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가 경제 활력을 완전히 잃었던 IMF위기 때였다. 격문보다 시가 오래 살아남는 건 정치가 예술을 누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개인적으론 영화 ‘일 포스티노’의 실제주인공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문구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아니면 사라졌을까’. ‘질문의 책’이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호기심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 고민은 만국 공통의 사춘기 현상인 모양이다. 대한민국의 20대 여성듀오 볼빨간사춘기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나의 사춘기에게’ 중).

내게도 두려운 시간은 엄습했다. 지금 돌아보니 ‘슬기로운 소년생활’의 시작엔 문학의 향기가 있었다. 그 당시 중 고등학교마다 ‘문학의 밤’이라는 가을행사가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이던 소년은 ‘액자 속의 내 얼굴’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사진 속의 아이는 늘 웃고 있다. 나는 그 아이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단순한 내용인데 그날 초대시인(김용호)은 유독 그 소년의 시를 칭찬해주셨다. 약효는 오래갔다. 그 사진은 아마 내가 찍힌 것들 중에 가장 오래된 사진일 것이다. 요즘 과거의 흑백사진을 한 장 한 장 휴대폰으로 찍고 있다. 그 사진들만으로 나중에 여러 편의 뮤직스토리를 만들어볼 참이다. 배경음악들로 뭐가 좋을까.

‘고등학교에 다닐 때/라디오와 함께 살았었지/성문종합영어보다 비틀스가 좋았지/생일 선물로 받았던 기타/산울림의 노래들을 들으며/우리도 언젠간 그렇게 노래하고 싶었지’(동물원 ‘우리가 세상에 길들기 시작한 후부터’ 중). 우리는 선에도 길들여지고 악에도 길들여진다. 무너지고 무뎌지면서 마침내 영혼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진다.

작사, 작곡한 동물원(사진) 멤버 김창기는 현직 정신과의사다. 잊고 산 것들을 노래로 불러내는 솜씨가 탁월하다.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혜화동’ 중).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왠지 그 친구가 과거의 나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난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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