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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09월 17일(火)
A : 때로는 ‘죽임’이 필요하지만… ‘죽여도 괜찮은’ 존재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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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작가

Q : 지구에서 어떻게 삶의 지속을 추구할 것인가

③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1944~)

인간의 敵, 기계를 부숴라?
러다이트 해법 옳지 않아
오히려 기계는
‘다정한 나’가 될 수도

사이보그란 이미지로
여성을 노동서 사실상 소외
페미니즘적 비판의식 유지

모든 폭력을 반대하는 건 비현실적인 주장일 뿐
우리 모두는‘반려종’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어
상대 없이는 존재 불가
매 순간 책임있게 응답해야



◇인류세인가, 자본세인가?

▲  황희선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과정
노벨 화학상을 받은 네덜란드 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2000년에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인간 활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커서, 쥐라기나 홀로세처럼 하나의 새로운 지질 시대가 도래했다고 봐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과학자들이 지층이나 암석의 연대를 알아낼 때 쓰는 방법을 최근 생성된 지층에 적용해 보면 뚜렷하게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원자폭탄 투하로 급상승한 방사능 수치, 화학비료의 영향으로 눈에 띄게 증가한 인의 농도, 플라스틱 등 인공 합성물의 존재, 여섯 번째 대멸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종 다양성의 급감 등이다. 인간은 정말로 지질 시대를 가를 만큼 큰 흔적을 지구에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명한 과학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가 볼 때 인류세라는 표현에는 미심쩍은 점들이 있다. 인간 모두가 화석 연료나 비료를 과도하게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 유역에 사는 토착 민족들은 현재의 환경 파괴와 거의 무관하다. 더욱이 인류는 모든 변화를 주도하고 관장하는 유일한 행위자도 아니다.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과도한 책임 의식의 이면에는 인간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나 착각이 서려 있다.

해러웨이는 이와 같은 인간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활동과 맞물려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파악하고자 한다. 해러웨이가 선호하는 ‘자본세’(資本世·Capitalocene)라는 개념은 이러한 목적에 보다 적합하다. 이 표현은 플랜테이션 농업이나 자본주의적·식민주의적 생산 체제의 도입 등 인간 활동이 지구에 미친 영향의 역사를 추적하거나 현대의 글로벌 사회가 작동하는 모습을 분해해서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령 플랜테이션 체제에서는 단작(單作)하는 것이 보통인데, 상품성 있는 작물의 다량 생산을 위해 균질한 재배 조건을 조성하고 대규모 관개 시설도 도입한다. 그로 인해 균질화된 환경에서는 모기나 부레옥잠 같은 특정 종이 창궐하게 된다. 자본세는 이처럼 자본주의적 식량 체제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지구 생태가 받은 영향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비판

해러웨이의 비판은 자본주의를 겨냥한다. 하지만 해러웨이는 자본주의라는 초월적 원인에 의해 만사가 돌아간다는 듯 세상을 총체화하거나 자본주의를 너무 완벽한 체제로 기술하는 바람에 구체적 문제에 대한 대안이나 해법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태도를 경계한다.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서사, 우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기술이 필요하다.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려면 익숙한 전제를 바꿔야 할 때도 있다. 문제에 대해 비판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1985)은 (남성)인간(Man)이 자연을 재료로 삼아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비판을 다시금 비판한다. 기계는 (남성)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든 도구일 뿐이며, 문제를 일으킨다면 버린 뒤 유기체적 삶을 복원해야 한다는 비판이 그런 사례다. 이런 관점은 각종 정보기술(IT)과 기계장치를 인간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해러웨이가 볼 때 기술을 거부하고 악마화하는 러다이트 해법(19세기 초·중반의 기계 파괴 운동)은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선언문의 문구를 인용하면 기계는 “다정한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과학(technoscience)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누가 기술과학에 접근할 수 있는지, 누가 악조건에서 물리적인 생산 공정을 수행하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사이보그 선언’이 발표된 1980년대는 냉전의 한가운데서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체제가 등장한 때이다. 이 글에서 해러웨이의 사유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논의와 맞닿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통상 남성의 일로 여겨지는 생산(공장 노동 등)과 여성의 일로 여겨지는 재생산(출산, 가사 등)을 구분하면서 젠더의 기존 경계와 규범을 공고화하는 담론을 반박한다. 성별에 따른 이분법은 여성에게 특정 역할을 강요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당시 진행되던 정치·경제적 변동은 젠더 지형을 이미 재구성하고 있었다.

그즈음 IT 기술의 진전과 더불어 전면화하기 시작한 ‘불안정 노동’(precarious work)은 서비스 산업의 등장과도 관계가 깊다. 불안정 노동의 경험은 타인의 필요에 부합하는 일, 일로는 인정되지 않는 일만을 수행하도록 강요된 여성의 경험과 닮아 있다. 또한 비정규직의 증가와 더불어 가족 임금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지불해도 된다고 여겨졌던 여성이 본격적으로 임노동 시장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노동이 ‘여성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노동 현실이 여성 억압과 구조적으로 닮은 만큼, 더 효과적인 분석과 대응 전략을 제시하는 주체는 여성, 특히 대항적 네트워크를 읽고 만들 줄 아는 여성들일 수도 있다. 해러웨이는 더 나아가 사이보그라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을 사실상 배제하고 소외시킨 활동들을 젠더의 경계를 넘어 재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남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기던 노조 활동, 기계를 다루는 작업 등이 그런 사례다.

해러웨이의 페미니즘적 비판 의식은 이후 저작에서도 유지된다. 두 번째 선언문인 ‘반려종 선언’(2003)에서는 해러웨이 본인이 반려견과 입맞춤하는 과정, 중성화 수술을 받은 반려견들이 성적 쾌감을 추구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비생식적 성애와 친밀성을 보여 준다. 해러웨이는 이 일화들을 통해 성이 생식을 위해 존재한다는 통념, 즉 성에 대한 목적론적 사고방식이 부정하는 세계의 단면을 긍정한다. 이와 같은 비판은 여성을 ‘출산 기계’로 환원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 및 퀴어 이론의 논의들과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해러웨이가 함께 살펴보자고 제안하는 출구는 “사이보그는 사생아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사이보그는 지구의 절멸도 불사할 핵전쟁, 심지어는 문자 그대로의 우주 전쟁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지 않던 시대에 전쟁 기계의 일종으로 고안됐다. 하지만 사이보그가 꼭 그와 같은 참극에 동원되리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근본으로 여겨지는 것을 배반한다는 뜻에서 사이보그는 사생아가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해러웨이는 이 단어를, 순수하다고 가정된 범주 사이의 경계, 이를테면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동물,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가 와해되며 출현하는 혼종적 존재를 일컫는 데 두루 사용한다.

◇소중한 타자들과 윤리적 태도

해러웨이는 인간(hum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부엽토(humus)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사람은 문자 그대로 흙이 변형된 형태이며 종국에는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핵전쟁과 같은 종말론적 결말을 맞을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세속 천주교인으로 일컫는 해러웨이는 인간이 이 땅과 현세의 거주자인 테란(terran)이며, 유한한 지구에서 잘 살고 잘 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죽음과 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비현실적 주장과는 다르다. 폭증하는 인구가 교란한 지구, 예를 들어 외래종의 유입으로 토착종이 절멸 위기에 처한 지역에서는 때로 책임 있는 태도로 누군가의 죽음을 야기해야 할 때도 있다. 현재의 지구에는 삶의 지속을 추구하는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죽여도 괜찮은’ 존재로 만들어 상징적·물리적으로 두 번 죽이는 폭력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푸는 실마리는 해러웨이가 제시한 ‘반려종’이라는 개념에서도 나온다. 반려자(companion)라는 말은 라틴어로 ‘빵을 나눈다’(cum panis)라는 표현에서 비롯됐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라는 뜻이다. 동거하는 이들의 삶은 완벽히 이상적이지도, 마냥 나쁘지만도 않다. 흔히 말하듯 함께 살다 보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는 법이다. 반려는 ‘보송보송하고 아늑한’ 관계와는 다르다. ‘나’는 관계에서 분리돼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관계 이전에 이미, 또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마주한 가운데 다른 누군가가 돼 갈 뿐이다. 이것이 반려의 의미다. 그 관계는 식민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와 같은 폭력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분노와 고통으로 환원되지 않는 강렬한 기쁨의 경험을 선사하기도 한다. 해러웨이가 보기에 사태를 긍정과 부정 중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이 둘 모두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 매 순간과 매 관계에 고유한 문제 속에서 책임 있게 응답할 수 있는 능력(response-ability)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필요한 윤리적 태도이다.

황희선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과정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도나 해러웨이는

분야 - 페미니즘 이론, 과학학 및 과학사, 문화 비평

사상 - 사회주의 페미니즘, 에코페미니즘, 기술과학의 민주주의, 포스트휴머니즘

주요 활동·사건 - 가부장제적 자본주의 비판, 인간 중심주의 비판, 반과학주의 비판

약력 - 1944년생 페미니스트, 과학학자, 문화 비평가로,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다학제적 연구를 진행하면서 인문학과 기술과학을 상호 침투시키고자 한다. 콜로라도대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한 뒤 예일대에서 ‘결정, 직조, 장: 배아를 구성하는 은유들’이라는 논문으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의식사학과 석좌교수다.

저작 - 초기 대표 저서로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관점이 두드러지는 영장류학사 연구서 ‘영장류의 시각’(1989)과 ‘상황적 지식’ 등 초기의 주요 논문을 수록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성’(1991)이 있으며, 1997년에는 과학 혁명의 역사와 현대 생물학의 페미니즘 비평을 담은 ‘온건한 증인’을 펴냈다. ‘해러웨이 선언문’(2016)에는 해러웨이를 유명하게 만든 ‘사이보그 선언’(1985)과 그 뒤를 잇는 ‘반려종 선언’(2003), 오랫동안 지적으로 교류해 온 영문학자 캐리 울프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에서는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정치적 사유와 실천에 적합한 이미지가 각각 사이보그와 목양견이라고 주장한다. 울프와 나눈 대담에는 해러웨이에게 영향을 준 개인적·지적·정치적 배경이 두루 담겨 있는데, 과거부터 최근까지 해러웨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두어 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최근 펴낸 ‘트러블과 함께 머무르기’(2017)에서는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생명체의 촉수처럼 유연하게 사유할 것을 권한다. 기존 개념들이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게 됐음을 수긍하고, 인간, 동물, 식물 등 다양한 반려자들과 새로운 해법을 찾아보자는 제안이다. 편저 ‘인구 대신 친족 만들기’(2018)에서는 인구 폭증으로 야기된 생태 파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인간 이외의 존재를 포괄하는 재생산 정의(reproductive justice)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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