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음악동네>경연예능서 ‘국민가수’ 탈락 수모… “니가 지금 나라면 웃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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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건모 ‘핑계’

국어교사 출신이 PD로 입사하니 생소한 말들이 적잖았다. 그 중 하나가 ‘나래비 쇼’였다. 일본어 ‘나라비(竝)’에서 유래한 말인데 ‘줄을 서다’ 혹은 ‘줄을 세우다’는 뜻이란다. 과연 음악프로그램에서 순서는 어떻게 정하는가. 선착순으로 할 수도 없고 장유유서, 즉 주민번호나 데뷔 순으로 노래한다면 그 또한 마뜩찮다. 결국은 인기 있는 사람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양새가 되는데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 김건모(사진)와 신승훈이 함께 출연하면 누굴 마지막 무대에 세우느냐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나래비 쇼’의 대안으로 나온 게 ‘서바이벌 쇼’다. 공연에 경쟁이 가미되면서 흡입력이 상승했다. 예전 미인대회에서 가장 인기 없는 상의 이름은 ‘우정상’이었다. 출연자들이 직접 뽑는 상이니 기쁠 만도 한데 표정은 어두웠고 수상소감은 미적지근했다.

‘서바이벌 쇼’에선 당사자와 구경꾼의 입장 차가 극명하게 다르다. 탈락이란 두 글자가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보는 사람은 재미있는데 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다. 그래서 공정이 생명이다. 최근엔 심사가 수사로 바뀌는 일까지 생겼다.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X 101’에서 시청자 투표결과가 조작됐다는 의혹과 함께 경찰은 정황이 담긴 녹음파일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는 경연 중 가장 오래된 프로그램(2011년 6월 4일∼)이다. 여기선 몇 번째로 무대에 오르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 객석과 대기실 모두 진행자 신동엽의 손을 주목한다. ‘신의 손’이 누구 이름이 적힌 공을 뽑느냐에 따라 출연자의 이해가 충돌한다. 맨 뒤에 노래를 부를 경우 한 사람만 이기면 단박에 최종우승자가 된다. 반대로 맨 처음 노래를 부른 사람은 다음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심판대에 올라가 명곡판정단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순서가 순위에 영향을 미친다면 차라리 모든 출연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각자가 직접 번호표를 고르는 방식은 어떨까. 옛날식이긴 해도 공정성 의혹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연출자의 시각에서는 출연자 면면을 볼 때 이런 시나리오가 시청률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유리한 계획이 섰더라도 그것이 ‘계획적’이라는 게 밝혀지면 시청자는 일거에 성난 무리로 변신한다. 누군가는 예능에서 재미로 하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따지느냐고 되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웃자고 한 이야기가 누군가를 울린다면 그건 예술의 목적과 거리가 멀다.

예능의 역사에서 공정성 때문에 시끄러웠던 사례가 2011년 3월 ‘나는 가수다’에서 발생했다. 기획은 참신했다. 전문가가 일반인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일반인이 전문가를 평가하는 프로그램이니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하지만 4회 만에 대형사고가 났다. 설마 21년 차 ‘국민가수’ 김건모가 탈락자로 호명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녹화장은 술렁였고 심지어 동료가수 중에는 울면서 무대를 뛰쳐나간 이도 있었다. PD는 김건모에게 재도전 기회를 주자고 조정안을 냈다. 하지만 정해진 룰을 흔드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제작진의 사과, 사죄, 사퇴를 요구하는 시청자의 항거가 폭주했고 비난 여론이 계속되자 MBC는 결국 방송을 중단했다. 사람들은 가수가 아니라 PD가 퇴장당하는 사태를 보며 ‘공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원칙을 깰 수는 없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내게 그런 핑계를 대지 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넌 웃을 수 있니’(김건모 ‘핑계’ 중).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