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달빛도 때로 가파른 산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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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스님 남해 염불암 주지

달빛이 은성한 밤엔 달구경
모든 아픔 감싸주는 따스함
수행자 마음도 그러하리라

삶이 아픔이 되어버린 사람
추석 한가위 소원 빌어보며
공덕짓기, 삶 의미 찾아보네

지난 추석 전날 신도님 몇 분과 절 뒤쪽에 자리한 저수지 길을 걸었다. 방죽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에도 달빛이 넘쳐 마치 달빛을 밟고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달은 역시 보름달이어야 하고, 그것도 한가위 보름달이 최고였다. 달빛이 은성한 밤이면 꼭 이렇게 달구경을 해야 하는 것은 달이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도 달빛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래서 탁발을 나가는 제자들에게 달빛과 같은 얼굴로 다니라고 당부하셨다. 달빛은 언제나 부드럽고 모든 아픔을 감싸주는 따스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도가 높다 하더라도 그 표정이 냉랭하다면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재가자들이 보시할 수 있겠는가. 달빛과 같이 수행자는 그 마음이 언제나 유연하고 착해야 한다. 수행을 하면 그런 마음이 반드시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달빛과 같은 표정으로 드러나게 돼 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둥그런 한가위 달빛은 잠잠한 저수지에도 차고 넘쳤다. 저수지 물 표면에 그려진 달빛은 하늘과 수면에 아름다운 빛의 선을 하나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달을 향해 합장하고 소원을 빌었다. 달빛 가득 머금은 보름달 앞에서 우리는 쉽게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그만큼 빌어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고, 상실의 아픔이 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달빛처럼 착하게 살려고 발원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저수지 방죽에 서서 우리 여섯은 각자 달님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짧은 결혼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혼자가 된 이들, 그리고 특수학교를 다니는 장애가 있는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는 오늘 달을 향해 어떤 하소연과 소원을 빌었을까. 낮에는 전단을 붙이고 밤에는 식당에 나가 일하시는 고된 삶의 어머니는 어떤 아픈 이야기를 달을 향해 하셨을까. 나는 달을 향해 합장하고 서서 소원을 비는 그들을 보며 달님에게 기도했다. 아프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려는 저들에게 달빛을 더 은성하게 내려 달라고.

산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나와 함께 달빛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삶이 아픔이 돼 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역경 속에서 오히려 성장하고 상처 속에서 회복의 진리를 깨닫는 이들에게 이 보름의 달빛은 얼마나 간절하고 새로운 것이겠는가.

그들은 내게 와 마치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듯 지난한 한 생애를 이야기했었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이혼을 하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고 했다. 남편과 자식을 떠나 혼자만의 인생을 간절히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이 모든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 답이 이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멀쩡하던 남편이 병들자 그 단호했던 생각들을 그는 더 이상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병든 남편을 버리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울먹이며 내게 답을 물었다. 나는 답했다. 금생은 짧다고. 혼자 참으면 병든 두 사람은 그래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지만, 떠나면 그들이 맞을 시간은 견디기 버거운 순간이 될 수 있다고. 함께 사는 것이 두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그는 달빛 아래서 아마도 발원했을 것이다. 병든 두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굳은 발원이 달빛처럼 넘치게 해 달라고.

사는 것이 어찌 편하고 좋은 것만을 선택하는 일이겠는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공덕을 짓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장수의 이유를 묻는 말에 공덕을 짓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내 삶을 일깨우는 한마디로 가슴속에 남아 있다. 그에게는 가족과 함께 남는 것이 공덕을 짓는 일이고, 그 공덕은 달빛과 같은 또 다른 생의 시간을 약속하리라.

소원 빌기를 마친 우리는 길게 이어진 저수지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우리가 걸을 때마다 달은 숨었다 나타나길 거듭했다. 달빛의 사라짐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때문일까. 산길을 돌아서면 비로소 우리와 함께하는 달빛. 우리의 걸음과 함께하느라 달빛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달빛은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달빛도 가파른 산길을 저렇게 힘겹게 넘어오는데 하물며 우리네 인생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석실 선사가 여러 스님과 달구경을 하는데 앙산 스님이 물었다. “저 달이 초승달일 때 둥근 모습은 어디로 갑니까?” 석실 선사가 답했다. “초승달일 때는 둥근 모습이 숨고, 둥근 달일 때는 그 속에 초승달이 있느니라.” 달은 언제나 둥글다. 다만, 시간과 위치에 따라 제 본모습이 가렸다 드러날 뿐이다. 우리네 인생 또한 그러하다. 때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 초승달 같아도 여전히 둥근 달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상실과 아픔의 순간에도 회복기의 아침을 위해 둥근 달의 나머지 부분이 환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면 아픔과 상실이 다만 지나가는 한때의 구름이라는 것을 오래지 않아 알게 되리라.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 하늘의 달님을 보라. 때로 달빛도 애써 가파른 산길을 넘어야 하지 않는가. 착한 사람들, 그들은 이미 그 진리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발길에 달빛이 뽀얗게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