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모의 지식카페>정약용 지방으로 보낸 ‘결정적 실수’… 정조 개혁 와해 시키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수원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 정조 18년인 1794년 건축됐다. 장안은 수도를 상징하는 말이자 백성들의 안녕을 의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역사인물학

박현모의 한국형 소통이야기 - ② 인사실패 사례 : 1795년 정조

남인 중심 정약용·이가환 충청 동시발령… 노론·소론 당쟁 격화로 탕평책 무너져
친척들 궁에 불러들여 ‘우현좌척’ 원칙 깨…‘언행불일치 국정’에 신뢰 잃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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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 1776∼1800년 재위)를 가리켜 흔히 ‘미완의 개혁군주’라고 부른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있어 그는 정치(人材)·군사(戎政)·경제(民産) 등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근본(邦本)을 굳건히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야말로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부지런히 국정에 매달린 사람이 정조였다. 그는 당파와 신분, 지역을 초월해 인재를 등용, 정치의 혁신을 도모했다. 장용영(壯勇營)이라는 국왕 친위부대를 창설해 군령체계를 일원화하는가 하면,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규제를 혁파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거래(通共)할 수 있도록 시장규칙을 변경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시대는 변화와 희망이 꿈틀댔다. 서울 등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변 지역에 채소 과일 등 상업적 농업이 발달했다. 서얼과 아전 등은 자신들에게 씌워진 신분적 제약을 타파하기 위해 통청(通淸·청요직이라는 핵심관직까지 승진 허용) 운동을 전개했으며, 15만여 명이 과거를 보겠노라며 하루 동안 도성 안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과거열풍’은 당시 망국의 현상으로 비판되기도 했으나, 나는 긍정적인 지표로 읽는다. 노론의 장기집권이 계속되면서 소론과 남인 쪽 사람들은 스스로를 ‘나그네나 손님 같은 신하(羈旅之臣·기려지신)’로 자처하면서 나랏일을 외면했었다. 그런 그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오고, 국왕이 직접 관장하는 규장각이나 장용영에 발탁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분명 국정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징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나라 상황을 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세도정치기로 불리는 정조 사후 63년간(1800∼1863년) 정국은 안동김씨 등 소수의 외척 가문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군 개혁의 상징이었던 장용영은 정조가 사망한 지 불과 2년 만에 혁파되었다. 신해통공과 같은 규제 혁파 역시 큰 상업세력을 형성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말년에 그는 “아무리 고심해도 정치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나 혼자서 천 칸을 다 지키는 격”이라고 개탄하곤 했다. 말하자면 개혁을 통해 도입된 새로운 규칙이 자리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 구성원들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밤늦게야 겨우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일어나면서까지’ 정성을 기울인 정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까? 새롭게 형성된 질서가 자기 지속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언제 무엇을 했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나는 지난 9월 내내 정조실록을 읽었다. 이번에 실록을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것은 24년 동안의 재위 기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개혁과 관련해서 그의 재위 기간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어떤 분은 정조가 재위 초반에 개혁 약속만 하고 바로 추진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다. 초반에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 정조는 ‘정치적 생존’ 자체가 목표였다. 온통 정적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기존 질서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은 곧 왕위에서 쫓겨날 것을 감내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년, 즉 재위 20년 이후에는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미 체력적으로 고갈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개혁 반대 세력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정조가 놓쳐버린 정치적 기회는 재위 중반의 어느 시기였는데, 이번에 내가 집중해서 읽은 것은 그의 재위 19년째인 1795년이었다.

1795년은 겉으로 볼 때 태평성대 그 자체였다. 왕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 잔치를 준비하느라 새해 초부터 조정은 들썩였다. 윤 2월의 ‘8일간의 수원 행차’ 동안 왕은 화성행궁 낙남헌(洛南軒)에서 노인들을 극진히 대접하는가 하면, 오가는 길에 상언 127건을 판하해 백성들의 고충을 처리했다. 3월에는 창덕궁 후원 잔치에 여러 신하를 초대해 꽃구경을 하고 좌척우현(左戚右賢)의 정치, 즉 친인척을 멀리하고(左) 어진 인재들을 가까이 하는(右)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10년 뒤인 갑자년(1805년)에 상왕으로 물러나 조선 전기의 태종처럼 주상을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하겠다는 ‘갑자년 구상’을 발표한 것도 1795년이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전북 전주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 있는 정조의 표준 영정.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움’에 도취된 탓이었을까? 정조는 ‘좌척우현의 정치’를 약속한 그다음 날 자기 친척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역모 죄에 연루돼 유배 가 있는 자신의 고모 화완옹주와 이복동생 은언군과 더불어 집안의 기쁨을 나누겠다는 왕의 조치에 대해 신하들은 크게 반발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 휴학(捲堂)에 들어갔고, 대신들은 벼슬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갔다(6월). 좌의정 유언호가 말했듯이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인데,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왕 치하에서는 결코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없다’는 게 신하들의 판단이었다.

이 시기에 정조는 일종의 이중 몰입(competing commitment)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몰입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현재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미래 목표에 맞게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정신 모형 2를 선언하거나 지향함에도 불구하고(몰입 1) 익숙한 현재 삶의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정신 모형 1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몰입 2) 현상을 말한다(윤정구, ‘진성리더십’).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행동 모델과 실제의 행동 모델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곧 이중 몰입인 것이다. 정조는 신하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좇으라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지도자였다. 좌척우현의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친인척 문제로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곤 했다. 한마디로 신하들의 눈에 정조는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군주로 간주되었다. 정조가 고심해서 임명한 신하들이 집요하게 왕을 비판하고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이 친척 만나기를 계속하자 노론의 신하들은 마침내 천주교 문제를 들고 나왔다(7월 초). 당시 왕의 조처를 “타당하다”고 보고 따르고 있던 정약용(‘자찬묘지명’ 64쪽) 등 국왕 지지세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천주교 문제라는 뜨거운 감자가 다시 거론되자, 정국은 급격하게 사학(邪學=천주교) 성토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노론의 박장설은 남인의 이가환을 지칭해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그 요술을 확대 전파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7월). 성균관 유생들은 정약용 형제가 이가환에게서 천주교를 전수 받아 “사학의 우익(羽翼) 노릇을 하고 있다”고 집단 성토했으며, ‘새로운 것에 힘쓰고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務新好奇)’ 왕의 태도 때문에 천주교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개혁을 주도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의 후계자로 주목받던 이가환과 정약용은 물론이고, 국왕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몰린 것이다.

‘푯대가 바르지 않으니 그림자가 비뚤어지게 나타난다’는 비판에 당황한 것일까? 그즈음에 정조는 작아 보이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이가환과 정약용을 각각 충주 목사와 금정(지금의 청양) 찰방으로 내려보낸 조치가 그것이다. 정조의 의중은 단순했다. 천주교가 가장 강하게 확산되는 충청도 지역을 맡아 잘 다스리면 자연스레 그들에게 쓰인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는 게 정조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가환과 정약용을 동시에 내려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남인 내에서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단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진 듯했다. 뛰어난 지식과 고급 정보를 가지고 채제공을 좌우에서 보필하던 그들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채제공은 “조정의 온갖 일이 재작년보다 작년이 못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빠지고 있다”면서 정승 직을 버리고 물러가 버렸다.

그러자 노론과 소론은 기다렸다는 듯 그 공백을 자기들 사람으로 채웠다. 특히 1795년 10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된 노론 벽파 심환지는 남인의 재등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799년 1월에 채제공이 죽자 남인은 더욱더 소외되었다. 정조가 정승의 천거 없이 이가환 등을 등용하려고 하자 노론과 소론은 일제히 천주교 문제를 들고나와 그 시도를 좌절시키곤 했다. 남인의 소외는 곧 왕의 고립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조는 여전히 화완옹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석방하는 일에 마음을 쏟았다. 그러자 신하들은 노론과 소론 할 것 없이 일제히 파상적으로 왕을 공격했다.

조선왕조의 인사(人事)를 깊이 연구한 혜강 최한기는 말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도 못 하는 자를 벼슬에 임명하는 것은 차악의 인사 조치다. 그보다 더한 최악의 인사가 있는데 그것은 편당 짓기를 좋아하고 일하는 방법에 무지한 사람을 인사 부처에 앉히는 것이다. 1795년 3월부터 10월까지 단 8개월의 부적절한 인사 조치와 이중 몰입만으로도 수십 년간 공들인 왕의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역사의 경험을 보면서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된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 용어설명

정조실록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 재위 기간의 실록. 54권 56책으로 1776년 3월부터 1800년 6월까지 24년 4개월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정조실록의 권두서 이름은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이다. 정조가 죽은 지 6개월 뒤인 1800년(순조 1년) 12월에 이병모를 실록총재관으로 이시수, 이만수, 김재찬 등이 편찬했다. 정족산본(鼎足山本)과 태백산본(太白山本), 규장각 판본인 규12758본이 있다. 그중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에, 정족산본과 규12758본은 규장각에 보존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