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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10월 15일(火)
Q : 현대 의학은 어떻게 질병을 실체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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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작가

A : 의료는 몸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해소·실험·조정하는 돌봄이 돼야

⑦ 아네마리 몰(Annemarie Mol, 1958∼)

표준화된 정밀검진·치료 속
질병·신체는 복수의 존재 획득
존재론적 기반 새롭게 규정

단순히 의사는 病을 알아내고
환자는 病을 앓는 과정 아닌
의료의 場서 함께 하는 행위

현대의학에서 의사는
불완전한 해결책들 조율하는
‘돌봄의 능력’ 갖추는 게 중요


“무슨 검사를 이렇게 많이 해야 하나?” 대학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 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해 보았을 질문이다. 동네 병원에서 이미 엑스레이 정도는 찍어 보았다고 이야기해도, 심지어 다른 병원에서 찍은 MRI 기록 사본을 제출해도, 대학 병원에서는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재차 요청하기 일쑤다. 해당 병원에서 모든 검사를 처음부터 새로 하지 않고서는 담당 의사 얼굴도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비난한다. 병을 고치러 간 환자를 상대로 병원이 돈벌이를 하려 든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에서 하는 무수한 검사는 단순히 돈벌이나 타 병원에 대한 불신 때문에 겪는 과정만은 아니다.

병원에서 우리 몸이 끊임없는 검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현대 의학이 환자의 신체를 정밀하게 진단하고 이에 따라 치료 과정을 표준화하도록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우리 몸은 검사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진단과 치료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화한다.


◇걸을 때 종아리가 아파요. 동맥 경화증인가요?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아네마리 몰은 동맥 경화증에 대한 문화기술지 연구를 바탕으로, 병원에서 환자의 몸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복수의 존재를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동맥 경화증은 혈관에 지방이 들러붙어 동맥이 좁아지고 혈관의 탄력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여러 증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걸을 때 종아리가 터질 듯이 아프고 발에 생긴 상처가 잘 낫지 않는다면 폐색성 동맥 경화증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환자의 몸에 동맥 경화증이 생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몰은 동맥 경화증을 진단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검사 방법, 진단 척도, 환자의 느낌, 그리고 이 모든 걸 종합하는 의사의 판단 등에 따라 병이 환자의 몸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점에 천착한다. 동맥 경화증 환자의 절단된 발과 하지 혈관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병리학자는 동맥 경화증의 병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병변이 실제 살아 있는 환자의 몸 어디에서 어떤 통증을 일으켰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진찰실에서 살아 있는 환자를 만나는 순환기 내과 전문의는 환자가 말하는 통증의 속성과 생활 습관을 통해 동맥 경화증의 위험 인자를 일차적으로 판단하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환자의 맥박을 들어 보는 검사를 하기도 한다. 청진기로 혈류가 흐르는 소리를 직접 듣는 이 검사에서 동맥 경화증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일종의 잡음, 소리로만 존재한다. 순환기 내과 전문의는 각종 영상 검사 결과를 통해 동맥 경화증의 진전을 확신하고 환자에게 수술을 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협진 요청을 받은 혈관 외과 전문의는 환자의 피부 상태와 맥박을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 수술 여부의 판단을 유보할 수도 있다. 이 각기 다른 개입의 방식들 속에서 동맥 경화증은 하나의 진단명 아래 여러 가지 실체를 갖는다.

현대 의학에서 몸이 하나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다양체’로 존재한다는 몰의 인식은 의학의 존재론적 기반을 새롭게 규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몸이나 질병은 하나인데 이를 해석하는 입장이 다양한 것이 아니다. 저마다 다른 지식 체계와 실천 속에서 몸은 하나 이상의 존재를 획득한다. 이는 진단 방식이나 치료 방식의 발전이 몸의 신비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몸의 존재 양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뜻한다.


◇선택이냐 돌봄이냐?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몸의 존재가 의학 기술에 따라 무한히 증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검사와 진단 과정을 거친 환자는 여전히 하나이고, 이제 그 환자가 수술을 할지 말지, 어떤 운동을 하고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누가, 어떻게 이 결정을 내려야 할까?

몰의 관점에서 병은 단순히 의사가 알아내는 것, 환자가 앓는 것이 아니다. 병은 의료라는 장 안에서 의사와 환자가 함께하는 행위에 가깝다. 다시 말해 병은 의학을 통해 객관적 상태로 규명될 수 없으며, 그것을 알아내고 앓아내는 과정을 통해 실체화된다. 병원에서 병을 아는 과정(의사의 일)과 병을 앓는 과정(환자의 일)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진단과 치료의 과정에서 의사의 개입은 본질적으로 환자의 경험에 의존해서만 실현 가능하고, 환자의 질병 경험 역시 의사의 지식과 조언에 따라서 확연히 달라진다.

질병 경험에서 의사와 환자의 상호 의존은 의료의 존재 기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 의학에서 가장 외면당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몸 다양체에 대한 몰의 관심은 이후 의료라는 장에서 돌봄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고민하는 철학적이고 실천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2006년에 출판된 ‘돌봄의 논리’는 ‘몸 다양체’에 비해 훨씬 짧은 저작이지만, 돌봄의 인류학에 대한 논의를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돌봄의 논리’에서 몰은 현대 의학을 지배하는 두 가지 논리, 선택의 논리와 돌봄의 논리를 대비시킨다. 의료에서 선택의 논리는 일면 환자의 권리를 증진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의사는 동맥 경화증 환자에게 약물 치료를 할 경우, 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할 경우, 혈관 우회술을 할 경우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주고, 환자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 방법을 선택한다. 이렇듯 의료를 선택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는 사고는 환자의 경험보다 의사의 판단을 우선시하는 시각을 극복하는 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 선택의 논리 끝에 대형 병원의 ‘의료 쇼핑’이 나타난다. 환자들은 이제 인터넷으로 각종 치료법을 미리 검색하고, 의사의 이력을 확인하고, 주요 대형 병원 중 어디가 좋을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선택의 책임은 고스란히 환자만의 몫이 된다.


◇의사는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

환자에게 선택을 맡기는 환자-소비자 모델은 허구에 불과하다. 질병에 대한 의료 지식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고통받는 존재인 환자에게 합리적 선택은 강요된 허상일 뿐이다. 무엇보다 의료는 상품이 아니다. 몰은 소비주의와 시민권 개념을 결합한 선택의 논리가 결국은 의사와 환자의 상호 의존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며, 동시에 돌봄에 바탕을 둔 의료를 불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질병이 복수의 존재론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질병 경험을 온전히 이해하고 설명하고 통제할 수 없음을 뜻한다. 따라서 의료는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몸의 존재론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를 조심스럽게 해소하고 실험하고 조정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즉 몰에게 돌봄은 의료 바깥에 있는 것, 전문적 의료인이 아니라 간병인이나 가족이 제공하는 감정적·신체적 수발 같은 것이 아니다. 돌봄이란 이처럼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의학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조율하는 모든 행위와 실천을 뜻한다. 몰의 논의에 따르면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환자에게 선택지를 주는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이 돌봄의 능력이다.

몸과 질병에 대한 아네마리 몰의 새로운 이해는 돌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돌봄은 의료의 발전, 더 나아가 여타의 과학 기술의 진화를 파헤치는 논법으로 읽을 수도 있다. 아픈 몸을 돌보는 일은 결국 이 아픈 몸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지식과 기술적 체계를 잘 돌보는 일과 다름없다. 취약한 존재의 필요를 인식하고, 불완전하더라도 책임감을 함께 나누는 일. 좋은 병원, 좋은 의사, 좋은 의료의 지형은 돌봄의 윤리와 정치 속에서 그려 낼 수 있다.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아네마리 몰은

분야 - 의료 인류학, 의철학, 과학 기술학

사상 - 존재론적 전회, 행위자-연결망 이론, 페미니즘

주요 활동·사건 - 스피노자상 수상, 네덜란드 왕립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위촉

네덜란드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로, 암스테르담대에 ‘몸의 인류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과학 기술학,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넘나들며 몸의 실재성과 존재론이라는 문제를 탐구해 왔다. 인류학적 연구 방법과 철학적 논의를 창의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수행했고, 병원과 요양 시설에서의 문화 기술지를 바탕으로 돌봄에 대한 철학적·실천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대표 저작으로 ‘몸 다양체’(2002), ‘돌봄의 논리’(2008)가 있으며, 최근에는 먹는 행위와 관계성의 문제를 탐색하는 유럽연구재단의 프로젝트를 이끈 바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상인 스피노자상을 2012년 수상했고, 이듬해 네덜란드 왕립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위촉됐다.

초창기에는 과학이라는 지식 실천 체계가 여성을 탐구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식, 나아가 과학이 여성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차이보다 여성이라는 대상을 만들어 내는 방식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존재의 복수성이라는 화두에 천착했다. 한편 타자성을 강조하는 인류학적 관점을 통해 과학 자체가 곧 이해와 탐구를 요하는 타자임을 강조했다.

과학 기술학 분야에서 존 로와 오랫동안 협력했으며, 행위자-연결망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다양한 방식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몸 다양체’에서는 여러 의학적 실천의 양상을 통해 몸의 복수성이 상호 연결, 조율, 조정되는 양상을 섬세하게 보여 줬다.

또한 도나 해러웨이의 친족 및 사이보그 논의, 메릴린 스트래선의 부분적 연결 등의 개념을 존재론에 대한 논의로 새롭게 읽어 냈다.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학자이지만, 막상 본인은 이론적 전환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존재론에 대한 논의는 정치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존재의 복수성에 대한 이해는 그 복수의 실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정치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말하는지, 누구를 위한 정치인지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뜻에서 이 문제를 ‘무엇의 정치(a politics of what)’라고 명명했고, 최근에는 무엇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돌봄, 먹는 행위 등을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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