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황홀한 즉흥연주와 마티니 한 잔…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이 담겨있는 재즈바는 소시민의 쉼터가 되고 있다.(김병종, 재즈는 영원히, 24×20㎝, 종이에 먹과 채색, 2019)

블루 노트, 슬픔 입문

뉴욕 재즈 카페 코튼클럽이나 블루노트, 그리고 디지스 클럽 코카콜라(Dizzy’s club Coca Cola)에 가면
예외 없이 젊고 늙은 연주자들의 화려한 즉흥 연주 속에 살짝 스며든 슬픔의 빛을 보게 돼.
저 뉴올리언스 미시시피 강변 따라 올라온 삶의 고단함과 한 계절의 노동, 구불구불한 인생 행로들이 보여.
그래서 재즈를 듣는 것은
판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해.
먼 옛날 흑인 노동요 같은 블루스는 판소리의 동편제 서편제와 같아.
야수의 포효 같은 루이 암스트롱에서도
강물처럼 흘러가는 찰리 파커에서도
여지없이
우리네 판소리식 슬픔의 가락과 빛이 들어있지.
해 저무는 들녘, 저 홀로 삼키는 소리 없는 울음이 있어.
관절을 꺾어서 내는 토착 방언들과,
아랫배 쪽으로부터 토해내는 통성(通聲)의 고해성사.
그리고 시크한 연주에 노래의 사연들마저 겹쳐진다니까.

뉴욕에 밤이 오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거리로 떠나가지만
맨해튼 다운타운과 할렘의 어딜 걷더라도 재즈카페를 피해가긴 힘들지.
코튼클럽이나 블루노트에서는 불빛 보고 돌아온 선박들처럼
밤이면 서로의 어깨뼈를 부딪치고
그 눈썹 끝에 달린 하루치의 피로를 닦아주며
흔들리는 불빛 아래, 기묘한 우정의
재즈 한마당이 열려.
지식인 홈리스들도, 하루 종일 직립보행으로만 걸어야 하는 넥타이 맨 노동자들도
이곳에 와선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마티니 한잔으로 목마른 쉬임을 얻게 돼.

세월의 때 묻은 헐렁한 재킷에 가죽바지,
나비넥타이에 캉캉구두, 재밌잖아.
그러니 인생의 버킷리스트들을 서둘러 내려놓을 생각일랑 말라구.
백발의 피아니스트가 애무하듯 열 개의 손가락이 부지런히
그랜드 피아노 건반을 오가는데
증조부 때부터는 내려왔음 직한
굵은 주름 아래 그 눈물과 웃음의 사연들을
칡뿌리 같은 손가락들로 살랑이는 바람처럼 전해준다니까.

어두워질수록
혹은 장엄하게
혹은 맑은 물소리처럼
튀어오르는 소리, 소리들.
그 소리들의 냄새를 맡아봐.
트럼펫의 애절함과 타악기의 질주가
서로 엮이고 풀리며, 만나고 헤어질 때쯤이면
어느새 우리네 삶도 한 옥타브씩 올라가고 있어.

그리고
살짝 끼어들었던 슬픔은
입문만 한 채, 어두운 바깥으로 쫓겨나 버리고 없지.
What a wonderful world !
타임스스퀘어의 불빛은 밤새 번쩍이지만
천만에,
그런다고 시간을 가둬 놓을 순 없어.
오히려 더 빨리 도망쳐버릴걸.
차라리 밤의 남은 시간을 붙잡아 두기는
푸르고 어두운 재즈클럽, 블루노트야, 코튼클럽이야, 재즈 갤러리야.
가끔씩 달빛이 내려와
저 홀로 건반을 두드리고 가는 것 같은 그 황홀함이라니.
거기에서는 흐린 날에도 별이 뜨고, 구름 속에서도 꽃이 피어.
제법 먼 곳으로부터 흘러온 듯한
내 인생의 희디흰 강물 같은 것이 희한한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며
천천히 눈 앞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도
그 뜻밖의 장소라니까.


⑤ 뉴욕 재즈바

다운타운이든 할렘이든
걷다 보면 만나는 재즈바
뉴요커·여행자에게 ‘쉼표’

트럼펫·피아노 애드리브에
야수의 포효 같은 재즈보컬
그저 리듬에 몸 맡기다보면
우리 삶도 한 옥타브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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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공연장에 발을 들여놨으면 재즈의 계보가 어쩌고 하며 시작하면 재미없다. 그저 타악기의 리듬 따라 발을 두드리고 노래 따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좋다. 재즈는 철저한 현전(現前). 그냥 눈 앞에 펼쳐지는 애드리브 연주와 퍼포먼스 같은 개성만발의 공연에, 그 들풀 같은 생명력과 야생의 맛에 빠져들 일이다. 그것이 재즈의 매력이고 중독성이다.

클래식이 작곡가의 아름다운 새장 안에 갇혀있는 음악이라면 재즈는 그 새장을 열어젖히고 창공으로 날아가는 새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는 드넓은 창공 어느 방향으로 날지 모른다. 다른 모든 현대 예술이 그렇듯이 재즈 또한 저마다의 출발과 태생지는 달라도 모여드는 종착지는 뉴욕. 그 뉴욕의 그 많은 재즈바가 각각 계보와 색채를 달리하고 있더라도 고단한 뉴요커와 여행자에게 삶의 쉼표가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누구는 이 도시에서 멀고 화려한 무대를 오페라 글라스로 음미하며 우아한 밤을 보낼 수도 있지만 다른 한곳에서는 연주자의 숨소리와 귀를 때리는 드럼 속에서 칵테일을 곁들인 버펄로윙 한 조각으로 하루의 피로를 털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불온하고 비속한 음악으로 여겨졌던 재즈는 이제 가장 미국적인 음악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그 많은 다운타운 웨스트 포(West 4)의 바와 클럽에서도 버드랜드(Birdland)나 블루노트는 유명 연주자들의 연주가 이어지는 오래된 명소다. 할렘 부근의 코튼클럽과 함께 세계의 재즈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격식을 풀어헤치고 조촐한 저녁 식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이 작은 뮤지컬은 무대와 테이블이 지나칠 만큼 가깝다는 것도 매력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한사코 멀어지려는 도시에서 사람의 거리를 좁혀 버리는 매직을 부리는 것이다.

세상의 명품 도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그 장소 자체보다도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의 에스프리(Esprit) 때문인 것은 자명하다. 파리의 카페 ‘되마고’나 아르헨티나의 문인카페 ‘토르토니’, 튀니스의 ‘카페 데나프’가 전설이 된 것도 그곳을 거처 삼아 드나들었던 별 같은 예술가들 때문인 것이다.

‘코튼클럽’이나 ‘블루노트’가 전설이 된 것도 벽에 붙어있는 쟁쟁한 연주자들이 그곳을 지나쳐갔다는 사실 때문이다. 벽의 사진들은 그래서 과거이면서 현재를 비추는 별이다.

내가, ‘어? 저런 파격적인 목소리가?’ 하고 TV로 재즈를 처음 듣고 보았던 것은 오래전 어느 상업 광고에 나온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였다.

훗날 블랙디스크로 듣는 목소리와 연주도 일품이었지만 그 가사 또한 음악사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나는 푸른 나무들과 붉은 장미를 봐요/ 나와 당신을 위해 피는 장미를 보는 거죠 / 그리고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는 거죠 / 이 세상,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가를.

나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봐요/ 축복받은 밝은 낮과 신성함으로 가득한 까만 밤/ 그리고 나는 또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하늘에 드리워져 있는 / 일곱 빛깔 무지개는 / 너무나 아름다워요/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마다/ 모두가 예쁘고 아름다워요/ 그들 모두가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나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어요/ 그들이 지나가는 것도 봅니다/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배울 거예요 / 그리고 나는 혼자 생각합니다/ 이 세상,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것인가를….

처처에 전쟁과 테러, 눈물과 한숨이 있지만, 아직도 폐허 속에서 꽃은 피고 어디선가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 이 세상,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 곳인가. 아직은, 아직까지는 말이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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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암스트롱 뮤지엄’ 된 퀸스 옛집

여명기의 시카고 재즈로부터 퓨전재즈와 포스트모던 재즈에 이르기까지 재즈사(史)에는 수많은 별이 있다. 재즈를 거의 클래식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작곡가 듀크 엘링턴에서부터 비운의 싱어였던 블루스 여왕 베시 스미스, 재즈의 신사 찰리 파커 등 헤아릴 수 없는 연주자와 싱어, 작곡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 폭넓은 대중성과 음악성 그리고 천부적 엔터테이너의 기질까지 갖춘 루이 암스트롱(사진)을 재즈사에서는 맨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카고 최초의 재즈클럽인 선셋카페(sunset cafe)에서부터 뉴욕의 코튼클럽(Cotton club)에 이르기까지 그는 재즈의 교주이자 전도자와 같은 이미지를 남겼다. 그가 아내 루실과 함께 오랫동안 살았던 퀸스의 옛집은 현재 루이 암스트롱 뮤지엄이 돼 있고 재즈 마니아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