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시골버스에 가을이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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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스님 남해 염불암 주지

정말 오래간만에 타보는 완행버스
고속버스와는 다른 ‘착함’느껴져

“내리실 분 내리세요” 기사 외침에
바람·햇살이 잠시 올랐다 내려

버스 안 우리는 코스모스와 닮아
모두가 가을이 되어 한들거리네

산골 작은 암자에서 법회를 마치고, 예약한 버스를 타기 위해 신도님의 차를 얻어 타고 길을 나섰다. 버스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암자에서 출발한 승용차가 대로에 나가는 순간, 여유는 다급함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일요일인 탓에 차들이 제법 도로를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하는 분이 차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시간의 차이…. 과속을 하고 신호를 위반하고 버스가 나오는 길목에서 버스를 세우면 탈 수 있을 것 같은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중이 할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운전하는 분을 향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예약돼 있던 버스표를 취소했다. 그제야 운전하는 분도, 뒷좌석의 나와 나의 도반 스님도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는 대신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렸다. 운전해 줬던 신도님 부부는 떠나고, 도반 스님과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차표가 없어 인근 함양까지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타보는 완행버스였다. 국도를 따라가며 인적 없는 정류장에서도 꼭 서야만 하는 버스. 고속버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착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시작과 끝만 있는 고속버스에 비해 고개를 돌고 들을 지나 구불구불 가는 시골버스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과정이 생략된 고속버스보다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시골버스에 대한 기대가 그날따라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버스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그러나 정답게 봤다. 얼굴은 검게 타고 이마엔 주름이 역력한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주였다. 그리고 등산복 차림의 사람 몇과 이국의 노동자 둘이 올라탔다. 이국의 노동자가 옆자리에 앉자 카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도 사람인가? 나는 그의 나라와 그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들을 가만히 떠올려 봤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을 떠나와야 했고, 이곳에서 거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는 순간이면 그 고됨을 잊던 착한 표정이 눈물처럼 투명하게 그려졌다.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든 조건이 돼 버린 사람들에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카레 냄새가 잃어버린 사랑의 향수가 돼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버스가 국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높은 교각 위에 세워진 고속도로를 올려다보며 시골버스는 국도를 따라 순하게 달리고 있었다. 지척에 피어 있는 코스모스가 산들바람에 투명하게 흔들렸다. 정답다. 꽃들의 전송을 받으며 이 길 위에서 나는 가을의 정의 하나를 만났다. ‘가을은 착하다’. 이 버스 안에서 그리고 이 길 위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삿된 것은 없다. 농사를 짓고, 이국에 와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남을 속이고 해치는 짓은 어쩌면 사치인지도 모른다. 고되지만 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코스모스를 닮은 것만 같았다.

버스가 ‘원지’에 섰다. 이곳은 성철 스님의 생가인 ‘단계’가 멀지 않은 곳이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내려 강 건너 단계까지 걸어 다녔다고 한다. 가야산 해인사 호랑이. 스님의 기개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괄괄한 스님들이 법거량을 청할 때에도 그는 예외 없이 단숨에 제압해 버리고는 했다. 그의 대처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호랑이’라는 그의 별칭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 기개 안에서 나도 꿈을 꾸기도 했다. 그 거침없는 자유의 꿈을.

그는 열반에 드신 지 오래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선객들은 오늘도 전설 같은 그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아직도 아름드리 같은 그의 그늘 아래서 여전히 대자유를 향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버스 문이 열렸다. 아무도 내리거나 타는 사람이 없다. 버스 기사가 외쳤다. “원지 내리실 분 내리세요.” 바람과 햇살만이 잠시 버스에 올랐다 내릴 뿐 인적 없이 버스의 문만 열렸다 닫혔다. 그 고요와 외로움. 곁에 앉은 스님이 말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날짜 가는 것을 몰라요. 그냥 찬바람 불면 긴팔 옷을 꺼내 입는 것으로 가을을 알 뿐이죠.” 원지와 가까운 곳이 고향인 스님의 그 말은 인적 없는 버스의 문 닫는 소리만큼이나 긴 쓸쓸함을 남겼다.

‘누구는 너를 보고 그리움이라 한다

누구는 너를 보고 외로움이라 한다

꽃대가 흔들려서 그리움인가

꽃대가 가녀려서 외로움인가

(중략)

보라 늙은 농부가 위태롭게 경운기를 끌고 가는

어둑어둑 저문 들길을 꽃등 밝히듯

한 줄로 도열해 웃는 저 환한 눈망울을

억새풀 마른 가슴 적시는 새벽이슬처럼

삶의 상처가 너무 깊은 사람들의 마을에

아무도 닫을 수 없는 작은 갓길을 내고 있다.’

달리는 버스의 차창에서 나는 이광석 시인의 ‘코스모스가 핀 들길’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어쩌면 시골버스와 버스 안의 우리 모두가 코스모스인지도 모른다. 코스모스처럼 우리 모두도 역시 외로운 마을에 닫을 수 없는 길을 하나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가을이었다. 성철 스님도 촌로도 이국의 노동자도 그리고 등산객도 나와 나의 도반도 모두 가을이 돼 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착하게 산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있을까. 버스가 굽이진 국도를 달리고 코스모스가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