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선진국은 어떻게 해냈나>佛·獨도 일자리·교육 불평등… 포퓰리즘 아닌 근본개혁 ‘정면돌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2월 7일 중동부의 한 소도시에서 열린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해 고질적인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개혁 방안을 청중들에게 직접 설명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佛, 빈부격차 커지고 경제는 시들
노동자 천국이 청년 실업률 20%
퇴진위기 마크롱 60일 전국투어
국민 생각 들으며 개혁안 등 설명
일자리 36만개↑ 정규직률 최고

핀란드, 공정한 보육시스템 주목
아기출생 동시에 출산박스 지급
동등한 출발 17세까지 동일교육

지난해 11월 17일 프랑스 전역에서 몰려든 ‘노란 조끼’ 시위대 28만 명이 파리 샹젤리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차를 불태우고 은행·상점 유리창을 깨트리며 경찰과 강경대치한 시위대는 ‘정의로운 사회’ ‘더 큰 민주주의’ ‘마크롱 퇴진’ 등 날 선 구호를 외쳤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유류세 인상, 부유세 폐지 발표가 불을 댕겼지만 시위 기저에는 고질적 빈부 격차, 활력 잃은 경제와 함께 노동자 천국으로 불리면서도 청년실업률이 20%를 넘을 정도로 불공정한 일자리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노란 조끼 시위는 프랑스를 넘어 벨기에, 독일 등으로까지 번졌다. 이 가운데 불공정문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낸 국가들은 포퓰리즘적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 개혁안으로 대타협을 이뤄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대화를 통해 일부 계층이 아닌 사회 전체가 고통을 분담하는 방향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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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유연성 강화로 불평등 해소 = 31일 프랑스24 등에 따르면 약 1년간 불공정, 불평등을 화두로 프랑스를 뒤덮었던 노란 조끼 시위는 마크롱 대통령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한 국민 공감대 형성, 노동개혁과 기회균등 확대라는 본질적 변화 노력을 통해 오히려 잠든 프랑스 경제를 깨우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의 2분기 실업률은 2017년 같은 기간 9.7%에서 8.5%로 떨어져 금융위기 이후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정보기술(IT)기업 등을 중심으로 일자리도 늘었다. 마크롱 대통령 취임 후 36만7000개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다. 정규직 비율은 2분기 55%로 15년 만에 최고치를 달성했다. 덕분에 지난해 11월 23%까지 추락했던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9월 현재 36%로 반등했다.

‘부자들의 대통령’ ‘보나파르트’ 등으로 비난받고 퇴진 위기까지 몰렸던 마크롱 대통령이 반전에 성공한 비결은 끊임없는 사회적 대화, 소통을 통해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월 15일 노르망디 지역 소도시에서 열린 첫 토론회에서 6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쏟아지는 질문에 일일이 답했다. 이후 두 달간 프랑스 전국을 돌며 직접 국민의 생각을 듣고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안을 설명했다. 이런 노력 끝에 3월까지 이어진 국민 대토론에는 4개 주제, 34개 문항을 놓고 100만 명 이상이 논의에 직접 참여하거나 의견을 전달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소통 노력에 국민도 차츰 마음을 열었다. 8월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52%가 마크롱 정부가 제안한 노동개혁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정규직 과보호 등 일자리 불평등 문제를 고용유연성 강화, 직업훈련 강화라는 정공법으로 맞선 점도 성공 요인이다.

‘일하는 프랑스를 만들자’는 구호를 내세운 마크롱 대통령은 악명높은 프랑스 노조의 철밥통을 해고 시 기업 책임을 줄이고 산별노조가 아닌 기업별노조와 임금협상을 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면돌파했다. 대신 비숙련 근로자에게 디지털 교육을 지원하는 법안을 입안하는 등 일할 의지가 있는 근로자에 대한 직업훈련 기회를 크게 확대했다. 쉬운 해고로 실업자가 급증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평생고용 부담을 덜어낸 기업들은 오히려 신규 채용을 늘렸고 청년실업률은 큰 폭으로 하락했다.

네덜란드와 독일 역시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일자리 불공정 문제를 성공적으로 정면돌파한 국가로 꼽힌다. 2차 세계대전 후 호황을 누리던 네덜란드는 1970년대 들어 과도한 사회보장 지출, 물가상승 등으로 실업률이 12%를 웃돌고 기업파산이 증가하는 등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자 네덜란드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노사 양측의 타협을 끌어냈다. 뤼트 뤼버르스(1939~2018) 당시 총리는 1980년 최저임금 동결, 1982년 공무원임금 동결을 선언하면서 노사가 일자리문제 해법을 자율합의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네덜란드 노동계와 경영계는 1982년 11월 24일 마라톤 회의 끝에 임금인상 억제, 물가연동 임금인상제 폐지, 근로시간 단축 등을 내용으로 한 바세나르협약을 체결했다. 1990년대 이후 통일 후유증, 경제성장 둔화에 따른 실업률 상승으로 위기에 봉착한 독일 역시 게르하르트 슈뢰더(75) 총리와 노사 대표들이 모두 참여한 하르츠위원회를 구성, 6개월에 걸친 집중 논의와 연구를 통해 고용시장 유연성 확대를 핵심 내용으로 한 하르츠개혁을 성공시켜 고용개선, 기업경쟁력 회복 등을 이끌어 냈다.

덴마크는 100년에 걸친 노사 간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정규·비정규직 간 불공정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 및 고용시장 경쟁력을 유지했다. 덴마크에서는 ‘기업이 어제 고용한 인력을 오늘 해고할 수 있을 정도’로 손쉽게 인력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 근속연수가 길다고 고용안정성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대신 직장을 잃어도 종전 소득의 70%에 달하는 실업급여를 최대 2년간 지급하고 직업훈련 등을 통해 안정적 구직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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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보육시스템도 저출산 및 불공정 해소에 중점 = 유럽 선진국들은 교육 및 육아 문제에서도 사회적 대화를 통한 대타협을 통해 불공정문제를 해소해 나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노란 조끼 시위 이후 대학 입학제도 수리에 나섰다. 마크롱 행정부가 앞장서 학생들의 사회·경제적 배경 다양화를 촉구했고 엘리트교육의 상징인 그랑제콜도 적극 화답했다. 지난 14일 파리고등사범학교(ENS 파리), 고등상업학교(HEC), 에콜폴리테크니크, 에섹(ESSEC) 등 프랑스의 대표적 그랑제콜 8곳의 총장들은 고등교육부에 차상위계층 학생들의 선발 확대를 위한 개선안을 제출했다.

공정한 보육시스템 확립으로 저출산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는 대표적 국가로는 핀란드가 손꼽힌다. 핀란드가 가장 강조하는 복지는 ‘동등한 출발’이다. 실제 핀란드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탄생과 함께 정부가 지급하는 ‘출산박스’를 통해 동일하게 삶의 출발선 상에 놓인다. 이 박스에는 아기 옷과 육아용품 등 63가지 품목이 똑같이 들어있다. 커다란 박스 자체가 아기 요람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출산박스 대신 현금을 원하면 170유로가 지급된다. 높은 영아사망률, 낮은 출산율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7년 처음 생겨난 출산박스는 저소득층에 주로 지급됐는데 1949년부터는 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전 국민이 누리는 기본권리가 됐다. 핀란드 국민은 핀란드가 산모 및 영아사망률 최저국가로 자리 잡은 주요 이유로 이 출산박스를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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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후에도 공정한 보육시스템은 이어진다. 대다수 임산부는 정부 산하기관인 ‘네우볼라’를 통해 임신부터 출산, 취학연령인 6세까지 육아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문제를 지원받는다. 임산부가 네우볼라에 등록하면 초음파검사부터 출산, 육아 상담 모두 무료로 제공된다.

이후에는 영유아 80% 이상이 국공립어린이집으로 진학해 동일한 교육서비스를 받는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치면 8세부터 17세까지 공교육기관인 종합학교를 반드시 다녀야 한다. 핀란드 정부는 아이가 17세가 될 때까지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아동수당도 지급한다. 덕분에 핀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들은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공정한 조건에서 경쟁해 원하는 진로를 선택할 수 있다.

◇세계 곳곳 불공정 항의 시위 봇물 = 칠레 시위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시작됐는데 기저에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 누적이 자리 잡고 있다. 급격한 물가상승, 서민·중산층 가계부담 급증, 극심한 빈부 격차에 대한 항의다. 레바논에서는 ‘SNS 이용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정부 정책 발표에 분노한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고, 29일 결국 사드 하리리 총리가 사퇴를 발표했다.

불공정의 확대재생산은 연구결과에서도 확인된다. 플로렌시아 토치 미국 뉴욕대 교수 연구결과에 따르면 경제적 수준이 상위 20%인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 중에는 무려 44%가 이후 상위 20% 내의 경제 집단에 들어간 반면, 하위 20%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 중에서는 7% 안팎 정도만이 상위 20%대에 진입한 것으로 추정됐다. 경제 수준 하위 20% 그룹의 30% 이상은 최하위 그룹을 그대로 유지했다.

김남석·김온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