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도 열광했던 ‘동양적 추상’의 美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남관의 1979년도 작품 고독(2). 콜라주와 데콜라주 기법 등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다. 캔버스 위에 신문지와 오일, 130.3×162.2㎝, 부분, 1979. 현대화랑 제공

- ‘남관의 추상회화’ 展

황폐한 뜰·허물어진 고적 등
옛유물서 영감받아 작업 몰두

1955년 파리行… 90년 작고
주요 작품 60여점 한자리에
“동·서양 아우른 그림 독보적”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 45.5×33.4㎝, 부분, 캔버스 위에 오일, 1978.

서양미술사에서 추상은 ‘배제의 원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궁극의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화폭에서 역사성과 종교, 인간의 일상 같은 구상적인 것들을 다 배제하고 선과 색, 면만 남겼다. 그래서 추상미술은 ‘삶의 요소가 거세된 회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 예술철학자 캘빈 시어벨트는 “현대미술은 훌륭한 알파벳을 다듬었지만 그 안에는 말할 거리가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 같은 서구 추상미술의 맹점을 비켜 가며 ‘동양적인 에스프리(정신)’를 ‘배제된 화면’에 담아내 당대 유럽 화단으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이가 남관(1911∼1990)이다. 현대화랑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인 남관의 회고전 ‘남관의 추상회화 1955-1990’전을 열고 있다. 이달 30일까지 계속될 전시에는 작가가 파리로 건너간 1955년부터 작고한 1990년까지 제작한 주요 작품 60여 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몽파르나스에 화실을 마련, 본격적으로 추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고대 유물과 유적지에 영감을 받은 작품을 발표한다. 때 묻은 벽, 황폐한 뜰, 오래된 성이나 유적 잔해같은 풍경이 화폭에 펼쳐졌다. 회색이나 자색 계열 물감으로 세월이 흘러 마모되거나 녹슨 듯한 색감과 질감을 냈다. 종군화가단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참혹한 기억도 등장했고 1962년부터는 상형문자와 한자, 마스크 형상도 가미된다.

파리 화단은 열광했다. 정착 1년 만인 1956년, 파리시립미술관의 ‘현대국제조형예술전’에 참여하고, 1958년 전위적 예술모임인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한국인 최초로 초대받는다. 평론가 가스통 딜은 “ 동양문화의 어느 일부조차 희생시킴 없이, 동서를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융합시키는 거의 독보적인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남관 역시 작가노트에 “나의 에스프리의 연원은 동양이다”고 썼다. 남관은 1966년 당대 제일 권위 있던 망통회화비엔날레에서도 ‘태양에 비친 허물어진 고적’이라는 작품으로 1등상을 수상하며 성가를 높인다.

이재언(인천아트플랫폼 관장) 미술평론가는 “남관의 그림은 1950, 1960년대 프랑스에서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어둡고 무기력해진 실존주의적 화면에 신비한 빛과 아우라를 선물하며 당대 추상미술(앵포르멜) 화단에 새로운 희망과 혼을 불어넣었다”며 “화면의 은근하고도 신비한 빛은 폐허조차 탐미적으로, 때로는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신기의 연금술사로 비쳤다”고 설명했다.

1968년 귀국한 남관은 청색을 중심으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콜라주와 데콜라주(화면에 붙인 재료를 떼어내 그 부분에 다시 색을 칠하는 기법)를 통해 추상과 구상 성격을 동시에 가진 독특한 작품세계를 완성한다.

현대화랑 전시를 계기로 한국 추상미술사에서 남관의 위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김현숙 KISO미술연구소장은 “남관이 1960년대에 파리에서 추상화를 꽃피웠다면, 김환기는 1960년대 뉴욕에서 추상화를 완결했다. 남관과 김환기는 국제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에서 한국의 추상미술을 꽃피운 양대 갈래를 대표한다”고 강조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