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시련을 만날 때나 기일이면… 꿈에 찾아오시는 아버지

구정만(1925∼2010)

당신의 영정 앞에서 절하는 모습을 아버지께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신다. 4남매가 함께 모인 자리가 아버지께서도 몹시 기쁘고 행복하신 모양이다. “올해도 제사상을 준비하느라 애썼구나. 고맙다. 아이들아!” 하시고는 수저를 들고 정성껏 차린 음식을 맛있게 드시는 아버지의 늙고 초췌한 모습이 안타까워 “아버지!”하고 목이 메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 올해도 당신의 기일을 앞두고 찾아오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사를 위해 준비해둔 영정을 꺼내 들자 아버지가 활짝 웃고 계신다. 기뻐하는 모습만 기억하려고 아버지가 건강하실 적의 사진을 영정으로 준비해둔 것이다. 2010년 85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가신 지 올해로 9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해마다 기일이면 잊지 않고 꿈에 나타나신다.

비단 기일뿐 아니라 시련을 만나 내가 힘들거나 좌절감을 느낄 때면 어떻게 아셨는지 항상 꿈에 나타나곤 하셨다. “셋째야 너무 심려하지 말거라. 이 아비가 반드시 지켜줄게!” 그때마다 꿈속에서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명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허투루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뵙고 나면 이상하게도 점차 고민거리가 말끔히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심장병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내게 아버지의 모습은 생활력이 강하고 예능 방면에도 탁월한 멋쟁이로 기억된다. 못마땅한 일이 있으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나타낼 뿐 아니라, 지인들과의 회식자리에서도 가장 먼저 지갑을 여는 화끈한 성격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기타,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 악기에 만능일 뿐 아니라 노래 솜씨도 뛰어난 분이었다. 귀가하실 때마다 우리들이 좋아하던 선물이며 먹거리를 잔뜩 사 들고 오시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소년 시절을 보낸 나의 고향은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작은 시골 마을이다. 간척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오토바이 사랑이 유별했다. 무릎 가까이 오는 롱부츠와 가죽 재킷 그리고 헬멧에다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낸 다음 ‘부릉부릉’ 굉음을 남기고 마을 어귀로 사라지던 아버지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아련하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날엔 주로 피아노 앞에서 시간을 보내셨다. ‘그리운 금강산’ ‘가고파’ 등 우리 가곡은 물론 자식들을 위해 동요까지 들려주시고 마을 사람들과 흥을 나누기도 했다.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 실력도 대단했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 ‘짝사랑’. 원로가수 김정구처럼 구성지게 넘어가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새삼 그리워진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아버지처럼 멋지게 불러보려 애쓰지만 실력이 한참 못 미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형제들에게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남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던 아버지가 노년에 들고부터는 어머니 일을 돕고 끔찍이 아끼셨다. 집안 청소는 물론 다림질, 주방 설거지에 이르기까지 나서던 모습을 생각하면 허약해진 어머니가 아버지 마음에도 짠하고 안쓰럽게 느껴지셨나 보다. 아버지가 임종하실 무렵 “하늘나라에서도 부디 행복하십시오”하고 손을 잡아 드리자 나의 손을 움켜쥐던 아버지의 힘이 아직도 전율처럼 짜릿하다. ‘먼저 가니 부디 어머니를 편하게 잘 모셔라’하는 마지막 당부로 그때의 기억을 가슴 깊이 새길 뿐이다. 어머니를 뵐 때마다 꿈에 아버지를 만났다는 말씀을 드리면 어머니는 한 번도 꿈에서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럴 때마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자주 찾아와 주십시오. 그리고 항상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하고 어머니의 뜻을 전해드린다. 하늘나라에서도 ‘그러마!’하고 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 주시리란 상상을 하면서…. 아들 구종상

동서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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