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웹 | 지면보기 PDF | 2020.7.6 월요일
전광판
Hot Click
문화일반
[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11월 26일(火)
Q : 디지털 기기는 어떻게 지구를 황폐화하는가?
  페이스북트위터밴드구글
▲  변영근 작가

A : 지구의 ‘심원한 시간’ 착취…‘계획적 구식화’로 소비·고갈 부추겨

(13) 유시 파리카(Jussi Parikka, 1976∼)

비물질적으로 보이는 디지털
지구에 원초적으로 속해 있는
광물·금속·화학 물질에 의존

근대 이후의 채굴의 역사는
더깊은 곳 자원 고갈시킨 역사

자본주의와 결합한 기술 개발
강박적 신제품 출시로 이어져
버려진 전자제품은‘좀비’처럼
흙·물 등 환경파괴 가속화시켜


최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컴퓨터와 같은 소비자용 기술 미디어는 전화선, 포트, 저장 기기 대신 무선 인터넷, 블루투스 페어링, 온라인 백업·공유 서비스를 기반으로 모습을 탈바꿈했다. 기술 미디어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핀란드 출신의 미디어 고고학자 유시 파리카는 오늘날의 기술 미디어조차 ‘물질적’이라고 주장한다. 디지털 장치는 그 내부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도록 반짝이고 매끈한 표면으로 마감돼 있다. 파리카는 디지털 장치가 마치 닫혀 있는 블랙박스 같다고 지적하면서 무엇이 디지털 장치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지 탐색한다.

파리카가 최신 미디어 기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광물, 금속, 화학 물질 등 본래 지구에 속해 있던 원초적 물질의 존재다. 일례로 리튬은 스마트폰, 랩톱 컴퓨터, 전기 자동차에 들어가는 배터리에, 백금은 액정 화면을 포함한 일련의 컴퓨터 제반 장치에, 콜탄은 휴대전화 등의 전기 회로에 각각 필수적인 핵심 원료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추상적 기술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의 일부로 존재하던 물질 덕분에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물질들이 애초부터 열리지 않도록 만들어진 장치 내부에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를 체감하기 쉽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온 작은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파리카는 사회학자 벤저민 브래튼의 이 문구를 인용하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채굴돼 지난한 가공 끝에 일상생활로 들어온 지구 속 물질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것이 최신 미디어의 실질적 기반이자 ‘지반’임을 밝힌다.

비물질적으로 보이는 기술 미디어가 실은 물질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은 기술 미디어 장치를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데기와 ‘새로움’이라는 자본주의적 이미지를 한꺼번에 벗겨 낸다. 오늘날 많은 디지털 기기는 혁신을 표방하며 첨단 상품처럼 거래되지만 실제로는 새롭기는커녕 인간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희토류를 비롯해 오늘날 기술 미디어에 이용되는 물질들은 지구 역사 전체에 걸쳐 생성됐다는 점에서 행성 규모의 시간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리카는 미디어 기술의 지질학적 특징을 지칭하고자 지크프리트 칠린스키의 ‘심원한 시간(deep time)’ 개념을 차용한다. 칠린스키는 보고 듣는 장치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서 현재의 주류 기술로 진보한 결과라는 선형적·목적론적 역사에 맞서, 과학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아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주류 역사에서 사라지고 잊힌 기이한 장치 실험을 살펴보았다. 칠린스키에게 심원한 시간은 미디어 아트의 불연속적 역사를 그리기 위한 개념이었지만, 파리카는 이를 유물론적 맥락에서 새롭게 사용한다. 그에게 심원한 시간은 화학·금속 물질이 지구에 존재했던 만큼의 지속을 의미하며, 소형화된 이동식 기기가 포함된 21세기의 미디어 기술은 지구의 심원한 시간을 동원하고 착취하는 것과 다름없다.

파리카는 단순히 과거의 시간을 회고적으로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심원한 시간이라는 개념을 인류세 시대의 반성적 사고와 연결 짓는다. 그것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의 심원한 시간으로 각각 뻗어 나간다. 우선 과거의 심원한 시간은 미디어의 자원으로 동원되는 물질이 유한하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지구 속 물질은 심원한 시간에 걸쳐 형성되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 내는 데 제약이 있고 현재의 수요도 따라잡을 수 없다. 실제로 근대 이래 채굴의 역사는 더 깊고 더 먼 곳까지 자원을 차례차례 고갈시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채굴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던 미지의 영역, 즉 ‘심원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로써 심해나 북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주마저 채굴의 장소가 된다. 이런 지정학적 맥락에서 과거의 심원한 시간에 대한 파리카의 논의는 채굴의 주체인 글로벌 대기업과 국민 국가를 향한 예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한편 미래의 심원한 시간은 전자 폐기물과 관련이 있다. 지질학적 물질이 전자 제품이 되려면 각종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은 지구를 물리적·화학적으로 파괴하는데, 환경 파괴는 전자 제품이 효용을 다하고 버려진 이후에도 이어지며 심지어 더 심각해지기까지 한다. 전자 제품은 결코 완전히 죽지 않는다. 전자 제품은 버려진 뒤에도 흙, 물, 대기 등의 환경 조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흔히 가상 세계와 같은 추상성 및 비물질성의 차원에서 미디어 문화에 접근하고 열광한다. 하지만 그 결과 물질적 잔여가 대규모로 생성된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한다.

파리카는 버려진 뒤에도 폐기되지 않는 미디어 장치를 ‘좀비 미디어’라고 명명하고, 비디오 게임 회사 아타리의 ‘게임 무덤’을 그 사례로 든다. 1980년대 아타리는 졸작 게임들을 무분별하게 기획했다가 흥행에 참패하고, 미처 판매하지 못한 게임기와 게임팩을 미국 뉴멕시코주에 무더기로 몰래 매립했다. 이 무덤은 2014년 봄 세상에 알려졌는데 발굴된 게임팩은 손상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전자 폐기물을 썩히고 분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 준다. 파리카는 전자 폐기물이 단 몇 십 년만 쌓여도 거대한 쓰레기 지층을 형성할 수 있으며 인류가 지구에서 사라진 먼 미래에도 이 쓰레기 지층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의 심원한 시간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심원한 시간 또한 우주라는 심원한 공간으로 이어진다. 인공위성 궤도 위쪽에는 우주에서 활용되지 않은 인공 물체, 즉 우주 쓰레기들이 공전하고 있다. 파리카는 이 공전층을 궤도의 공동묘지 같다고 묘사한다. 이렇듯 오늘날 인류는 심원한 시간 동안 존재했던 물질을 동원하고 폐기하면서 효용을 다한 물질적 잔여를 지구 행성 바깥에까지 남기고 있다. 심원한 시간 이후 인류가 멸종한 시점에도 현재의 잔여는 미래의 화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계인이나 로봇은 이 화석을 통해 사라진 인류의 역사를 사변할 것이다.

미디어 원료의 고갈과 미디어 쓰레기의 잔여라는 문제의 중심에는 기술과 결부된 자본주의가 있다. 그중에서도 ‘계획적 구식화’(計劃的 舊式化·planned obsolescence)가 지금의 디지털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계획적 구식화란 제품 설계 과정부터 사용 기간을 짧게 설정해 최종 소비자들이 기존 제품을 수리하는 대신 새로운 제품을 구매하도록 장려하는 전략이다. 디지털 기기의 매끄럽고 간결한 외관, 설명서에 크게 의존할 필요 없는 직관적 사용성 이면에는 소비자 행동의 ‘블랙박스 모델’이 숨겨져 있다. 소프트웨어의 사용이 간편해진 만큼 소비자는 행동 유도성의 차원에서 기업의 의도에 따라 기술 미디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음새 없이 완성된 하드웨어의 외관은 미적 만족도를 높여 주지만 소비자들이 기기를 임의로 수리하거나 조작하는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이렇듯 계획적 구식화는 미디어의 기반이 지구 속 물질이라는 본질적 이해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지구적 고갈과 소비를 부추기고 그것의 잔여 주기를 더욱 빠르게 단축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파리카가 논하는 미디어의 물질성은 지구의 심원한 시간을 담은 구체적 개념이다. 미디어는 생태 조건을 이용하고, 용도를 다하면 그 자체가 새로운 생태 조건이 된다. 최신 기술과 자본주의가 결합한 미디어 기기의 개발과 사용은 금방 쓰레기가 될 신제품들의 강박적 출시로 이어져 환경 파괴를 가속화한다. 그의 주장은 잊힌 과거를 현재 관점에서 발굴 및 (재)맥락화하는 미디어 고고학적 방법론과도 공명한다.

파리카는 자연과 미디어, 인간과 비인간, 유기물과 무기물 등의 이분법을 탈피해 사회적·기술적 관계와 환경적·생태학적 현실을 구성하는 전 지구적 조건들을 통합적으로 다룬다. 또한 미디어와 지구가 심원한 시간으로 상호 연계된 양상들을 지질, 문화, 환경, 기술, 정치, 경제의 대상과 개념을 횡단하며 간학제적으로 풀어나간다. 이로써 우리는 현재 우리가 지구의 깊은 곳들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의 복합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유희적인 미디어 문화의 조건을 과거와 미래의 지구에 연결하는 자기반성적 상상력을 행성 규모로 펼칠 수 있다. 지구 환경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발상이 무색하기까지 하다. 파리카가 인류세적 위기를 인간, 인류보다 자본, 군사, 국가의 이해관계와 결부된 양상으로 분석했던 것처럼, 우리는 개인으로서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황을 직시하는 일은 은폐된 블랙박스 속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도전적인 과업이 됐다. 파리카의 대담하면서도 사려 깊은 주장은 우리의 이러한 직시를 위한 것이다.

심효원 한국예술종합학교 박사후연구원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유시 파리카는

분야 - 미디어학
사상 - 미디어 고고학, 미디어 생태학, 신유물론
주요 활동·사건 - 연구 단체 ‘미디어·기술 고고학’ 설립
관련 인물 - 지크프리트 칠린스키(독일, 미디어 학자, 베를린예술대 교수),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프랑스, 철학자), 에르키 후타모(핀란드, 미디어 고고학자, UCLA 교수), 볼프강 에른스트(독일, 미디어 학자, 베를린 훔볼트대 교수)

핀란드 투르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 사우샘프턴대 기술문화·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미디어학자다. 저서 ‘미디어 고고학이란 무엇인가?’(2012)와 공편서 ‘미디어 고고학’(2011)을 통해 미디어 고고학이라는 동시대적 접근법을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디어 고고학이란 ‘현재의 새로움 대 과거의 오래됨’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반대하며, 새롭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대상을 과거의 대안적 역사와 연결하는 방법론이다. 미디어 고고학자들은 주류가 되지 못했거나 잊힌 역사를 새롭게 발굴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새로움을 재고하는 동시에 과거를 새롭게 한다. 미디어 고고학은 개별적이고 특이한 이론적·예술적 실천이며, 주류로 수렴되는 사상의 역사적 계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 반영돼 있다.

대표적인 개인 저서로는 미디어 생태학을 주제로 한 3부작이 있다. ‘미디어 고고학이란 무엇인가?’가 역사에 새롭게 접근하는 방법론 자체를 다뤘다면, 3부작 중 마지막 순서인 ‘미디어의 지질학’은 미디어 고고학을 생태학적·환경적으로 풀어낸 개별적 실천이자 사상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전염’(2007)과 ‘곤충 미디어’(2010)가 유기물 중심의 논의를 담고 있는 데 반해 ‘미디어의 지질학’(2015)에서는 무기물인 지층과 광물을 둘러싼 미디어 환경을 분석한다. 미디어 생태학에서 말하는 ‘생태학’이란 자연과 미디어 문화의 환경 조건 둘 다에 해당하는데, 실질적으로 이 둘을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미디어 자연’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오늘날 인류세 담론에 동참해 미디어 문화 이면에 남겨진 거대한 규모의 전자 폐기물과 그것이 행하는 느린 폭력, 그리고 새로운 미래주의를 탐색하고 있다.


[ 많이 본 기사 ]
▶ 대검 “추미애, 尹수사지휘권 박탈은 위법”
▶ 유명 야구인 아들 수억대 사기행각…피해자 목숨 끊어
▶ 양기대 “박지원, DJ 잘 봐달라며 정치부장에 무릎꿇어”
▶ “팀닥터, 최숙현 자살하게 만들 수 있단 식으로 말했다”
▶ 권민아는 왜 폭로했나… ‘합숙생활’이 키운 K팝 그늘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 : m.munhwa.com ]
“중학생 5명이 집단 폭행” 초등생 ..
‘콘돔 끼우기’ 시연하려던 남녀공학 교..
중국 네이멍구서 흑사병 환자 발생…..
“지금이라도 사는 게 맞나”… 빗발치..
‘검찰 장악’은 독재 완성의 길목
topnew_title
topnews_photo 정은경 “증식 잘되고 감염부위와 결합 잘해 전파력 높을 것으로 추정”526건 유전자 분석 결과 이태원클럽-광륵사 등 333건서 GH 그룹 검..
mark양기대 “박지원, DJ 잘 봐달라며 정치부장에 무릎꿇어”
mark권민아는 왜 폭로했나… ‘합숙생활’이 키운 K팝 그늘
대검 “추미애, 尹수사지휘권 박탈은 위법”
‘특임검사 필요’ 검사장 의견 공개한 윤석열…최종..
“팀닥터, 최숙현 자살하게 만들 수 있단 식으로 말..
line
special news 손예진, 할리우드 진출한다…이선균 합류도 관심
앤드루 니콜 신작 ‘크로스’ 세부 논의 중배우 손예진이 할리우드에 진출한다.소속사 엠에스팀엔터테인먼..

line
유명 야구인 아들 수억대 사기행각…피해자 목숨 ..
美송환 피한 손정우 1년2개월만에 석방…추가 처벌..
이해찬 “靑·政이 정책 결정뒤 요청하는 黨政협의 받..
photo_news
‘시네마천국’ ‘황야의 무법자’ 영화음악 거장 모..
photo_news
‘물리학자’에서 ‘헐크’로 변신한 디섐보, PGA ..
line
[전지적 문화 시점]
illust
‘블랙핑크 스타일’ 글로벌 名品이 되다
[자동차]
illust
잘 빠진 N라인 꿈꾼다… 현대車의 ‘고성능’ 승부수
topnew_title
number “중학생 5명이 집단 폭행” 초등생 신고…경..
‘콘돔 끼우기’ 시연하려던 남녀공학 교사 학..
중국 네이멍구서 흑사병 환자 발생…조기경..
“지금이라도 사는 게 맞나”… 빗발치는 문의
hot_photo
양키스 다나카, 스탠턴 강습 타구..
hot_photo
우혜림·신민철 웨딩마치…“예쁘게..
hot_photo
다저스 프라이스, 142억원 포기하..
회사소개 | 광고안내 | 사업안내 | 이용안내 | 구독안내 | 독자참여 | 회원서비스 | 고충처리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책임자:한형민) | Site Map
제호 : 문화일보 | 주소 : 서울시 중구 새문안로 22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697 | 등록일자 : 2011년 7월 15일 | 발행·편집인 : 이병규 | 발행연월일 : 1997년 1월 1일
Copyright ⓒ 문화일보. All Rights Reserved. ☎ 02) 37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