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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게재 일자 : 2019년 12월 03일(火)
Q : 도시는 물리적 관계로만 이루어지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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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호 작가

A : 다층·다면적인‘정서의 場’… ‘살아 있는 공간’ 돼야

(14) 나이절 스리프트(Nigel Thrift, 1949∼)

도시의 다양한 물리적 조건
도시민의 다양한 경험·기억 등
유기적 연결 살피는 것이 중요

공간의미, 다층적 관계서 발생
사람의 수 비례해 다양성 증가

세종시,중심 비우고 환형 설계
평등 지향했지만 원주민 배제
市·시민사이 정서에 관심둬야


도시라는 공간에서 인간은 단수적(單數的·singular) 주체로 존재할까, 복수적(複數的·plural) 주체로 존재할까? 20세기 말까지 지리학자들은 인간을 단수적 주체로 간주했다. 이들은 도시민들 각각의 차이와 개성에 주목하기보다 도시민 전체를 하나의 변수로 보고, 도시를 올바르게 계획하고 설계하는 것만으로도 도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도시 공간과 인간이 단선적 인과 관계, 즉 재현적 관계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가령 누군가가 어느 전시장에서 행복하게 웃는 얼굴의 인물화를 감상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기존의 주류 지리학에 따르면, 이 그림은 감상자에게 행복한 감정을 자아내고(재현하고) 감상자의 행복한 감정은 다시 그림으로 투영(재현)된다. 당시에는 이런 이유에서 도시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재현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영국의 문화 지리학자 나이절 스리프트는 인간 주체의 복수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재현적 이해에 크나큰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지만 도시 연구에서 이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스리프트는 도시와 인간의 관계가 훨씬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특히 정서(情緖·affect)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만약 앞서 언급한 전시장의 온도나 습도가 불쾌감을 줄 정도로 너무 높거나 낮다면, 아무리 행복한 표정의 인물화를 보고 있다고 해서 감상자의 기분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옆 사람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거나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직후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행복한 그림과 행복한 감상자’라는 단선적 구조와 재현적 설명만으로는 그림과 감상자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억, 냄새, 온도, 습도 등 인간과 비인간 요소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신체적 감응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정서에 초점을 맞추면, 물리적 대상과 인간의 관계를 훨씬 다채롭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스리프트의 ‘비재현적’ 설명은 그간의 도시 연구가 거대 이론과 재현적 접근으로 점철된 채 도시와 도시민의 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실패했음을 역설한다. 이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시의 ‘정서적 장’(affective field)을 통찰해야만 한다. 즉 도시의 다양한 물리적 조건, 그 조건에 대한 도시민들의 다양한 경험·감정·기억, 생활 영역에 있는 다른 도시민들과의 관계 등을 다층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도시와 도시민의 유기적 연결을 이해할 때 도시와 도시민 사이에서 유영하는 정서 또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시의 도시 설계 과정은 도시민이 단수적 주체로 환원되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세종시 건립추진위원회는 도시 설계의 기본 개념을 국제 공모로 선정하기로 결정하고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를 심사 위원으로 초청했다. 하비는 중심 공간이 비어 있는 환형의 설계안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는 빈 중심의 환형이라는 공간 구조가 중심 없이 평등한 이념을 표현(재현)한다는 의도를 높이 평가했다.

만약 스리프트가 이 심사 과정을 지켜봤다면 아쉬움을 토로했을 것이다. 중심 없는 평등한 이념이 도시 공간에 재현된다고 해서 정말로 모든 도시민의 삶이 평등해질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은 오히려 단선적이고 일방적이지 않은가? 환형의 설계안은 세종시가 계획되기 훨씬 전부터 그곳에 살아온 지역 주민들의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세종시 중심 지역에 해당하는 빈 공간과 환형의 건축물이 들어설 공간이 원주민들의 생활 세계에서 어떤 지리적·존재론적 위상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세종시가 건설된 이후 세종시 원주민들은 어느 아파트 단지의 같은 동에 모여 살아가고 있다. 과연 이들 원주민이 현재 도시 공간에 대해 느끼는 정서는 설계안의 탈중심적이고 평등한 이념과 합치되고 있을까? 만약 합치되지 않는다면 어떤 과도기적 과정을 겪고 있을까? 원주민들은 과거 촌락 공간에 익숙한 자신들의 정서를 새로운 도시 공간이 요구하는 정서로 변환하려 노력하고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도시의 분위기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자신들의 본래 정서를 고수한 채 과거 삶의 터전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스리프트의 관점에서 보면, 이념과 그것의 영향을 받는 단수적 인간 주체의 재현적 도식만으로는 세종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도시 공간은 복수의 도시민과 그들의 정서를 통해 직조되기 때문이다.

스리프트는 도시민 개개인을 개별적 독립 변수로 바라보는 작업을 통해 도시민 삶의 구체적인 결들, 즉 인간과 비인간적 요소 사이의 정서가 도시 공간을 어떻게 직조해 나가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도시 공간을 덜 체계적이더라도 더 윤리적으로(less systematic/positivistic, more ethics) 이해해야 함을 역설한다. 더 다양한 인종, 계층, 성별이 도시에 모여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내는 이 복수의 주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들이 도시의 물리적 조직과 어떻게 정서적 관계를 맺고 유기적으로 결합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특히나 중요하다.

스리프트는 인간과 도시의 물리적 조직과 이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를 조명함으로써 인간과 도시의 관계에 대한 결정론적 사고를 잠시 유보하고자 한다. 도시 공간의 의미는 해당 공간을 구성하는 물리적 요소들과 인간의 반응에 따라 다양한 색채를 띠게 된다. 즉 도시 공간의 의미는 관계적 상황에 따라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과학적·실증적 방법만으로는 공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은 복잡하게 벌어지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상과 다양한 인간적 경험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에 비례해 도시 공간의 의미에 대한 다양성과 불확실성은 증가한다. 결정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실증적 접근으로는 도시 공간에 의미론적으로 내재된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다가갈 수 없다.

스리프트는 고정되지 않은 의미를 결정론적 사고로 파악하는 시도를 지양하고자 했다. 도시 공간의 의미는 공간과 인간 사이의 다면적·다층적 관계에서 발생하며 그 의미는 관계적으로 이해돼야 한다. 따라서 도시는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공간의 완결성을 논하는 사회 과학의 보수적 관점에서 벗어나, 공간과 인간 간의 정서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통해 이해돼야 한다.

이것은 도시 공간에 대한 사회과학적 접근과 인문학적 접근이라는 이분법의 화해를 의미한다. 도시 공간에 대한 사회 과학적 접근은 엄밀한 객관성을 통해 도시 공간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지향하고자 한다. 반면에 도시 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은 도시 공간의 핵심 요소를 인간으로 보기 때문에 인간을 감성적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스리프트는 도시와 인간 간의 관계적 접근을 통해 이런 이분법적 접근을 화해시키고 도시 공간에 대한 인식론적 합의를 도모하고자 한다.

도시 공간은 사회 과학적 접근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동시에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스리프트가 보기에 각각의 측면은 서로에 반하여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공존한다. 그는 각각의 측면이 연결된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연결되는지, 각각의 측면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연결되지 않는지를 확인하고자 도시와 인간 사이의 정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세종시를 예로 들자면, 공간에 재현된 평등의 이념이 세종 시민들의 삶에 실제로 재현된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그것이 이뤄지는지, 반대로 공간에 재현된 평등의 이념이 세종 시민들의 실제 삶에 재현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맥락에서 어긋나는 것인지를 분석하려면 세종시와 세종 시민들 사이의 정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스리프트는 도시와 인간 사이의 정서에 관심을 둠으로써 도시민들을 복수화하고, 동시에 도시를 살아 움직이는, 고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공간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도시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이 곧 도시 공간에 대한 이해임을 역설하는 스리프트의 지리적 사고는 도시를 죽어 있는 공간(dead spaces)에서 살아 있는 공간(vitalized spaces)으로 전환해 준다.

송원섭 전북대 지리교육과 조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 나이절 스리프트

분야 - 지리학·문화지리학, 정치지리학, 지리철학
사상 - 비재현 이론, 탈구조주의, 후기 현상학
주요 활동·사건 - 비재현 지리학의 창시자, 영국왕립지리학회 빅토리아 훈장 서훈, 영국 고등 교육 분야 기사 작위 서훈

1949년 영국 바스에서 출생한 문화지리학자다. 1978년 브리스톨대 지리학과에서 ‘지리학에서의 공간-시간 모델링: 공간 역학을 통한 구조적 접근’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워릭대 부총장을 거쳐 현재 국립싱가포르대 방문학자로 재직하고 있다. 2015년에는 평생 고등 교육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연방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문화와 공간의 연결 방식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제시한 구조화 개념을 비롯해 정서, 비재현 등의 개념을 문화 지리학의 공간 연구에 도입했다. 공간적·지리적 환경을 인간 행위와 분리된 독립적·물리적 구조로 보지 않고 인간의 행위가 공간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공간이 물리적 환경으로서 인간 행위에 의해 매 순간 재편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고자 거시와 미시의 연계에 대해 탐구했다.

인간의 정서로 개념화되는 미시적 맥락의 상호작용이 거시적 공간 재편에 영향을 미치고, 거시적 과정이 인간 정서의 미시적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연구했다. 공간에 대한 미시 수준과 거시 수준을 동시에 탐구함으로써 문화 지리학 공간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자본주의 알기’(2005)에서 자본주의의 의미가 과학 기술, 금융 제도, 정치 제도, 기업 경영 방식 등의 다양한 요소와 맞물림으로써 인간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투영되고 나타나는지를 분석했다.

이로써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이 인간의 생활 세계에서 어떻게 다양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자본의 미시적 차원에 대한 관심은 ‘비재현 이론’(2007)을 통해 더욱 확장됐다. ‘비재현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와 인간 사이의 정서적 관계가 어떻게 물질적 경관으로 드러나는지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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