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비오는 날 고추밭 보면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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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금례(1924∼2000)

서울에서 서산으로 부모님 산소에 벌초하러 톨게이트를 지나 시골길을 가는 중이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시골 고추밭을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잦은 지방 출장으로 파주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해 걱정을 달고 다니면서도 이따금 전화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직장인으로 40대 후반이던 2000년 8월 하순, 때늦은 더위에 텃밭에 심어 놓은 고추가 열병을 앓고 있었다. 폭우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에 어머니는 고추를 따 안방에 쏟아놓으셨다. 다시 밭이랑을 둘러보고 내려오다가 빗물로 미끄러운 내리막길에서 나뒹굴고 말았다. 때마침 이웃이 발견해 파스를 붙여줬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고추가 물러질까 걱정스러워 아궁이로 기어가 불을 지피고 고추를 펴놓았다.

그제야 어머니는 모로 쪼그리고 누워 밭은 숨을 쉬었다. 나는 비 피해가 걱정돼 전화했다. 빗소리에 묻힌 희미한 음성에 놀라 동생과 단숨에 달려갔다. 먼저 고추 냄새와 연기가 우리를 맞았다. 어머니는 문지방에 엎드려 계속되는 매운 재채기로 땀이 흥건했고 파스를 붙인 가슴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급히 서울로 향했다. 차 안에서 어머니는 숨을 몰아쉬었다. 자정을 넘겨 도착한 병원은 총파업 중이어서 집으로 와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대학병원에서는 “흉추 압박골절인데 병원 사정이 이러하니 집에서 한두 달 요양하라”고 했다. 정성을 다했지만, 병색이 깊어지고 화장실 출입마저 못 하게 됐다.

아내와 나는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어머니는 두 달여 지나 어렵게 시골을 찾아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서울에서 몸을 추스르고 계셨다.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날 오후, 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이따금 잔기침을 하셨다. 환절기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한 것이었다. 온 가족이 병원에서 교대로 간호를 했다.

성탄절 새벽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생일이었다. 어머니는 가슴에 들어찬 물을 뽑는 나비 침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며 겨울을 거둬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렇게 어머니가 떠나신 지 열아홉 번이나 여름이 지나갔다. 나도 정년퇴직 후 인생 2막으로 시작한 철길건널목 관리인마저 올 연말 또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60대 중반인데 나이가 들수록 지금도 비 오는 날에 고추밭을 보게 되면 저절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맵고 알싸하게 되살아난다. 영원한 그 이름 박금례 어머니를 그리며 책갈피에 넣어뒀던 글 하나 남긴다.

어머니 박금례를 그리면서

소복소복 오시는/천상의 소릴 들으셨나?/파르르 떨리는 입술/중환자실에서/나비침을 맞는 시간에게/‘고마워요’/‘그럼 갈게요’//

애련한 팔찌 하나/남은 눈빛으로 건네고/눈꽃나라로/아득히 떠나셨다는/하지만/지금도/살아있는/연緣이라는/천생의 고리 하나!
아들 김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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