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와 시각>‘소피커’ 펭수의 한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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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문화부장

남극에서 온 EBS 연습생 ‘펭수’가 올해의 인물로 뽑혔다. 한 업체가 설문조사로 선정한 결과인데 펭수는 미스 트롯 송가인, 월드 스타 BTS를 제치고 올해의 인물이 됐다. 오랜 불문율이던 방송사 간 장벽을 가볍게 무너뜨리며 각종 인기 프로그램을 섭렵하고, 순식간에 구독자 100만 명을 돌파하며 유튜브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셀럽 펭수가 누리는 인기를 생각하면 ‘올해의 인물’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올해 나이 열 살, 키 210㎝, 커다란 몸집에 유쾌한 몸짓과 도발적인 말을 내뱉는 캐릭터는 알려졌듯이 남극 유치원을 졸업하고 월드 스타 BTS, 인기 캐릭터 뽀로로를 보고 한국행을 결심, 남극을 헤엄쳐 건너온 개인사를 갖고 있다. 남극에선 유달리 큰 덩치 때문에 외톨이였던 펭수는 EBS 오디션을 통과한 뒤 EBS 소품실에서 이불을 펴고 쪽잠을 자지만 최고의 크리에이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꽤 현실적인 설정에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사연이다. 이 같은 현실 캐릭터 펭수 인기의 최고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어떤 상황, 어떤 사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순발력 있게 ‘할 말 다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소위 소피커(소신 스피커)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소신대로 말하는 소피커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으로 꼽히는 신조어이다. 사장 이름을 수시로 입에 올리고,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하지 말라”며 “눈치 보지 말고 원하는 대로 살라”고 말하는 소피커 펭수.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소신 있게 말한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표 준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욕 먹기를 감수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펭수는 소신 발언을 부담 없이 일상적으로 소화해낸다. 2030 젊은 세대들, 직장인들이 펭수에게 열광하는 이유이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하는데”라며 가슴앓이를 하는 보통 사람들 편에서 즉각적으로 속 시원한 말을 내뱉는 언어의 최고 능력자이다.

펭수뿐 아니다. 저물어 가는 올 한 해 우리 사회에서 ‘소피커’의 활약이 눈부셨다. 올해 가장 핫한 유튜브 채널 중 하나인 ‘워크맨’의 아나운서 장성규는 여러 노동 현장에서 갑을 관계를 넘어 할 말 다하고, 올해 최고의 여성 개그맨 박나래는 ‘농염주의보’를 통해 ‘여성의 성’이라는 금기의 선을 넘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소피커였다. 인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은 또 어떤가. 미혼모에 술집을 한다고 손가락질받지만,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그 견고한 선을 넘어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조용조용, 하지만 ‘따박따박’ 다 한다.

이 ‘선을 넘는 소피커’들은 지난해 한국 사회의 키워드가 권력관계의 폭력성을 드러낸 ‘갑질’과 ‘미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랍다. 그 거친 시간을 통과한 끝에 그래도 우리가 소신 있게 자기 말을 하는 것을 삶의 대세로 잡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계급, 권력, 젠더, 일상의 오랜 구속 등 한국 사회에 깊게 그어진 온갖 선들을 넘어 자기 말을 하고, 그것에 귀 기울일 때 우리 삶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까 한다. 2019년 한 해의 끝에 서서, ‘갑질’을 넘어선 소피커들의 활약이 2020년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끌고 나가길 기대한다.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