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US오픈 연장서 승리하자
언론·팬 되레 승자인 플랙 비난
아들조차 “호건 이겨 가슴 아파”
20년후 아내는 스스로 목숨 끊어
미국의 벤 호건이 전성기를 누리던 1955년. 그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 US오픈에서 통산 10번째 메이저대회의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올림픽 골프클럽에서 열린 US오픈 4라운드에서 호건은 단독 선두로 경기를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인세 골프역사칼럼니스트
클럽하우스에서 대기하던 호건은 그러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캐디에게 “차라리 1타 차로 내게 지든가, 아니면 3타를 줄여 나를 이기든가 해야지 난 플레이오프가 내키지 않아”라고 중얼거렸다. 플랙은 16번 홀 버디로 호건에게 1타 차까지 따라붙었다. 17번 홀을 파로 마무리하고 마지막 18번 홀만을 남겨놓은 플랙이 두 번째 샷을 핀 2m 안에 붙였다. 버디면 동타가 돼 다음 날 18번 홀 연장전을 벌이게 된다.
호건은 불안했다. 일방적으로 호건을 응원하던 갤러리들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플랙은 마지막 퍼팅 하나로 인생을 바꿀 수 있었다. 무명으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대이변을 연출하느냐의 기로. 당시 34세의 플랙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는 아이오와주에서 미국의 대공황이 한창이던 1921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캐디가 되려고 골프장 벙커에서 밤을 새우며 줄을 섰다. 2차 세계대전 참전 후 우연히 고교 골프팀에서 배운 실력으로 근근이 프로생활을 하던 플랙은 1955년에야 처음으로 풀타임 시드를 받았다.
US오픈에서도 톱 랭커들은 비행기로 대회장에 왔지만, 플랙은 고물 자동차를 직접 몰고 왔다. 호건 등 특급선수는 특급호텔에 머물렀지만 플랙은 인근 허름한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가까스로 컷을 통과한 플랙은 마지막 날 공동 7위로 호건을 따라가 결국 1타 차로 마지막 18번 홀 버디 퍼팅을 남긴 상태. 그가 사용하던 클럽은 공교롭게도 호건이 제작한 머슬백 블레이드였다. 플랙은 퍼팅 자세를 취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친 공이 홀로 들어갔다. 버디를 잡아내 호건과 동타가 됐다. 둘은 다음 날 연장전을 치르게 됐다. 연장전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마지막 18번 홀만을 남겨놓고 플랙이 1타를 앞섰다. 이번에는 호건이 무조건 버디를 잡아야 했다. 긴장 탓이었을까. 마지막 홀의 드라이버 샷이 훅이 나면서 천하의 호건이 더블보기를 범하며 무너졌다. 플랙은 스승 같은 호건을 이긴 데다 메이저대회 첫 우승이었다. 그런데 이 우승으로 플랙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언론들은 오히려 호건이 패한 것을 더 크게 다뤘다. 팬들도 플랙을 비난했으며 플랙의 아들조차 “아버지의 우승은 기쁘지만 나의 멘토인 호건을 이긴 것은 가슴 아프다”고 말했을 정도.
영웅을 이긴 것이 오히려 플랙에게는 파렴치한 일이 돼 버렸다. 사람들은 두고두고 플랙을 비난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플랙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비난을 멈추지 않아 아내가 이를 견디지 못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조그마한 골프장을 소유했던 그는 경영 악화로 우승 메달을 경매에 넘겼다.
하지만 당시 사용했던 클럽만큼은 93세이던 2014년 임종할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다.
골프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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