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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19년 12월 12일(木)
포도의 ‘분노’ 듣던 소년, 아름다운 노동있는 ‘에덴’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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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임금에 시달리다 이주해 가는 포도원 농부들의 이야기를 그린 ‘분노의 포도’는 존 스타인벡의 출세작이 되었다.(김병종, 캘리포니아에 포도는 익는데, 29.5×40㎝, 종이에 먹과 채색, 2019)

캘리포니아, 에덴의 서쪽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세끼밥상은 자유롭지 못한가’

저임금에 맞선 존 스타인벡 ‘포도밭 운동권’이 돼 글 써 에덴의 동쪽은 이제 희미해져 건물 높아지고 풍요로운 도시로

안개 낀 금문교의 사진 때문이었을 거야.

십오세 무렵의 내게 샌프란시스코는 몽롱한 그리움의 도시였지.

그러다가 스무 살 즈음에 만난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라는 노래로 그곳이 진보와 자유

그리고 젠더의 분홍색 만발한 사랑의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오르락내리락하는 정겨운 거리, 고요한 예술가 마을 소살리토 그리고 중국인 거리….

하지만 그리운 사람처럼 그리움의 도시도

먼발치로만 보는 게 좋은 것 같아. 샌프란시스코, 그 에덴의 동쪽은 이제 내게 점점 에덴의 서쪽이 되어가고 있어.

샌프란시스코에 갈 때마다 꽃 대신 새롭고 멋진 건물들은 들어서는데

옛 분위기는 떠나가는 배처럼 희미해져.

심지어 물가의 ‘피셔맨스 워프’의 음식 가격마저 건물 따라 높아져만 간다니까.

그래서 얼른 이 도시를 벗어나 몬터레이 바닷가의 캐멀, 페블비치 쪽으로 향해.

가는 길에 한없이 이어지는 살리나스의 푸른 농사(農事)들을 보아야 비로소 멀미처럼 출렁대던 마음이 가라앉아.

역시 내게는 초록이 약이야. 그러다 저 어느 곳에선가 살았을

글 농사꾼 존 스타인벡이 생각나지.

몬터레이 만의 살리나스,

스페인어로는 ‘소금늪지’라는데, 그는 글쓰기의 소금늪지에 빠진 사내였어.

온화한 기후 때문에 포도와 딸기의 산지가 되었는데

외로운 소년 존 스타인벡, 가끔씩 포도 상자를 나르면서

그 속 포도들의 속삭임 소리를 들었을 거야.

대학을 때려치우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이야.

낮에 일하고

밤에 방향 없는 글 써서

사방으로 날렸지만 대답이 없어,

그때쯤엔 ‘결여는 나의 힘’이라는 것도 알았을 거야.

그럼에도 이 힘 좋은 사내, 지칠 줄도 모르고

그 억센 어깨로 포도 상자를 나르면서 쓰고

또 썼다지. 그때 아마 포도상자들 속의 속삭임은 ‘분노의 숨소리’로 바뀌었을지도 몰라.

저 홀로 익어서 툭툭 떨어지는 포도.

그의 귀에는 파열음을 내는 비명으로 들렸을 거야.

노동의 착취와 맞서고 저임금과 싸우며

마차에 가솔을 태우고 기약 없이 먼 곳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둥둥둥.

그의 가슴은 고동쳐 왔겠지.

왜 열심히 일하는데도 늘 세끼 밥상은

자유롭지 못한가. 어느새 그는 ‘포도밭의 운동권’이 되어 사회 쪽으로 발걸음을 성큼 내딛고 있었어.

포도의 진실을 알려야 돼.

그리하여 신문기자 르포처럼 써낸 ‘분노의 포도’로

그는 자고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유명해지고 말았지.

그에게 영광을 가져다준 ‘에덴의 동쪽’ 역시 캘리포니아 살리나스가 배경이야

그가 말하는 동쪽이란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봤을 때 아름다운 노동이 있는 곳, 그리고 약간 왼쪽.

이제 포도밭은 나파밸리로 가고 그곳의 포도는 더는 분노할 이유가 없이 호사를 누리고 있겠지.

살리나스는 딸기밭으로 바뀌고 딸기는 수줍어할망정 분노하지는 않잖아.



⑬ 농부 떠난 샌프란시스코

‘매일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세끼밥상은 자유롭지 못한가’
저임금에 맞선 존 스타인벡
‘포도밭 운동권’이 돼 글 써

에덴의 동쪽은 이제 희미해져
건물 높아지고 풍요로운 도시로


그 이름만으로도 살짝 설레 오던 샌프란시스코. 하지만 이제는 이곳도 분위기가 바뀌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건축박람회장같이 새롭게 들어선 세련된 건물들 아래로는 걸어가는 노숙인의 수도 늘어나 보이고, 푸근하던 인권과 평화의 도시에는 알싸한 위험 지수 같은 것도 피부로 와 닿는다. 언젠가 코리아 파운데이션 초청강사로 아시아 아트 뮤지엄에서 강의하던 때에는 호텔 음식마저 안 맞아 하루 한 끼를 거의 중국인 가게 한쪽에서 한국 컵라면 훌훌 불어 때우곤 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 도시를 자주 다녀갔을 시골작가 존 스타인벡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리나스의 가난한 농장과 이 풍요의 도시를 왕래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살리나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정처 없이 에덴의 동쪽으로 떠났고 소설 속의 톰 조드는 엘도라도를 향해 서쪽으로 갔는데 우직한 스타인벡은 이곳이 약속의 땅인 양 살아서도 죽어서도 마냥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그러니 그는 영원한 캘리포니아 살리나스인인 셈이다.

트럭을 개조한 캠핑카에 애완견 찰리를 태우고 정처 없이 다니며 ‘찰리와 함께한 여행’을 쓰기도 했던 그 노벨상의 작가. 아내가 세 번씩이나 바뀌었지만 결국 여행의 반려자는 애완견이었던 셈이다.

어떤 면에서 스타인벡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닮은 듯 다른 삶을 살았다. 헤밍웨이가 아바나의 별장 핑카비히야에 자주 유명인들을 불러 럭셔리 파티를 열었던 데 반해, 그는 낡은 차로 아메리카를 종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무와 외로움에 지쳐가기는 마찬가지.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 한 사람은 네 번째 아내의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고, 한 남자는 어둠 속에서 길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애완견 찰리와 불길을 바라보며 떠나간 사랑들과 붙잡을 수 없는 추억에 눈물지었던 것.

그런 면에서 작가란 너나없이 따스한 불빛을 찾아 헤매는 열세 살짜리 소년 같은 존재다. 불빛이 보이지 않는 겨울은 너무 춥고 불안해 스타인벡은 ‘불만의 겨울’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는 특히 체험의 픽션화에 능했다. ‘보지 않은 것은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주의 화가들과도 비슷한 셈이다. 작품의 어느 것 하나 그의 눈이 기록한 내면 일기 아닌 것이 없다. 살리나스의 스타인벡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의 생가는 빅토리아 시대의 낡은 건물 그대로다. 그가 첫 단편을 썼다는 집필실도 그 2층에 그대로 있고 태어났다는 방도 그대로다.

서른 무렵까지 변변한 일자리 없이 지내다가 첫 소설을 썼고 그의 어머니는 책방을 찾아다니면서 아들이 쓴 책을 사달라 간청했지만 완전 무명 신인의 책을 사주는 집은 거의 없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그런데 뒤집어보면 이런 궁핍과 고난의 세월이 그로 하여금 사회의식에 눈뜨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타인벡의 문체가 말(言)의 성찬이나 미문(美文) 지향이 아니라 건조한 기사체에 기운 것도 그런 이유일 터. 이 또한 헤밍웨이와 자주 비교가 되지만 역시 같은 듯 다르다. 한 사람(헤밍웨이)은 선이 굵고 간결하며 그 속에 마초적 힘의 우월과 소멸을 그리고 있다면, 스타인벡은 따뜻한 시선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수법으로 이웃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캘리포니아에 가면 교차로 같은 데서 가끔씩 지나가는 트럭에 개와 함께 탄, 중절모를 쓴 사내가 있는지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 존 스타인벡, 노동자의 삶 살며 글 써… 퓰리처상·노벨상 작가

존 스타인벡(John E Steinbeck·1902∼1968·사진)은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의 살리나스에서 태어나 자랐고 잠시 뉴욕에서 신문기자 생활도 했지만 해고된 후 다시 살리나스로 돌아와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이 각각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받게 되면서 일약 유명작가가 되고 두 작품 모두 영화로서도 성공을 거둔다. 특히 영화 ‘에덴의 동쪽’은 요절한 배우 제임스 딘의 출세작이기도 한데 반항적이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매력을 지닌 그를 픽업한 것은 명감독 엘리아 카잔이었다. 딘은 ‘자이언트’ 촬영을 마치고 포르쉐550 스파이더를 타고 캘리포니아 국도를 시속 180㎞로 달리다 맞은편 차와 정면 충돌해 사망했는데 그의 명연기와 극적인 죽음으로 ‘에덴의 동쪽’은 ‘문학’과 ‘영화’ 양면에서 더욱 잊히지 않는 명작으로 남게 된다. 한편 ‘분노의 포도’는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 미국 문학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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