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음악동네>올해 가기 전 해야 할 두 마디…‘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닐까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효신 ‘눈의 꽃’

‘모든 것이 세월 속에 지워질 때면/그땐 내 맘 알게 될 거야/너무도 사랑한 당신/영원히 못 잊을 당신’(주현미 ‘추억으로 가는 당신’ 중). 영원히 못 잊을 거면서 그땐 왜 이별했나. 음악동네 출입구에 새겨진 불멸의 수수께끼 중 하나다. ‘사랑이란 그런 거야/알면서도 때론 잠시 잊고 살지/많은 것을 잃고 나서/그때서야 후회하며 생각하지’(김학래 ‘사랑이란 그런 거야’ 중). 이따금 나는 여기서 받침 하나를 바꾸고 싶어진다. 사랑이 그런 게 아니고 사람이 그런 거라고.

추억은 기억의 편집이다. 편집이 되려면 분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난 예전에 연출했던 큐시트를 거의 다 모아놓았다. 30년 전으로 돌아간다(아니 돌아갈 순 없고 돌아볼 뿐이다). 1989년 12월 첫 주 ‘퀴즈아카데미’(MBC) 출연진 중 특이한 이름이 있었다. ‘천사와 악마’였다. 남학생은 경제학과, 여학생은 동양화과였다. 보기도 좋고 사이도 좋은 커플이었다.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냐”고 물으니 역할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니 우문현답이었다. 천사는 늘 천사가 아니고 악마도 늘 악마가 아니다. 천사의 말과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천사다. 천사의 마음이 동정심이라면 악마의 마음은 복수심이다. 악마의 습관적 언어가 ‘네 탓이야. 넌 당해도 싸’라면 천사가 자주 하는 말은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닐까.

‘어제 미사 봤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월요일에 이 질문을 했다면 가톨릭 신자일 것이다. 성당에 갔었냐는 질문이니까. 하지만 화요일, 수요일이면 경우가 다르다. 아마도 ‘어제 그 드라마 봤어?’일 가능성이 크다. 2004년 12월 말에 종영한 월화 미니시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KBS 2TV)의 최종회 시청률은 29.2%였다. 팬들은 서로를 ‘미사 폐인’이라 부르며 유대감을 다졌다. 어린 시절 호주에 입양된 무혁(소지섭)이 은채(임수정)를 만나며 달라지는 감성멜로다. 제작진은 포스터에 ‘죽음도 두렵지 않은 지독한 사랑의 기록’이라 적었다. 출생의 비밀과 시한부 생명, 삼각관계, 복수 등 이른바 막장의 요소를 완벽히 갖췄지만 거기에 뜻밖의 감동이 있었다. 연못에 흙탕물만 고인 것 같지만 그 물 위에 연꽃이 핀 거랑 비슷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인간의 성공에 조력자가 있듯이 드라마의 성공에 음악의 힘이 빠질 수 없다. 연못 위의 연꽃처럼 드라마 ‘미사’에는 박효신의 ‘눈의 꽃’(사진)이 피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걸요/바람이 차가워지는 만큼 겨울은 가까워 오네요/조금씩 이 거리 그 위로/그대를 보내야 했던 계절이 오네요’ (‘눈의 꽃’ 중). 겨울 드라마 하면 ‘겨울연가’와 함께 ‘미사’를 떠올리는 팬이 적잖을 것이다. 때마침 하시모토 코지로 감독의 영화 ‘눈의 꽃’ 개봉 소식도 들린다. 좋은 노래에는 국적을 묻지 않는다. 일본 가수 나카시마 미카의 원곡은 보이즈 투 맨도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제목은 그대로 ‘눈의 꽃(Snow Flower)’이다.

오늘 다시 그 친구들(‘천사와 악마’)이 떠오른다. 만약 결혼했다면 그때 그들쯤 되는 나이의 자식을 뒀을지도 모르겠다. PD에겐 즐거운 상상이지만 당사자에겐 악마의 편집일 수도 있다. 그때 그 기억이 지우고 싶은 장면일 수도 있으니까.

큐시트를 보니 ‘천사와 악마’가 출연한 날 초대가수는 조정현, 그가 부른 노래 제목은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였다. ‘너를 처음 만난 날/소리 없이 밤새 눈은 내리고/끝도 없이 찾아드는 기다림/사랑의 시작이었어/길모퉁이에 서서 눈을 맞으며/너를 기다리다가/돌아서는 아쉬움에 그리움만 쌓여도/난 슬프지 않아’. 아픔까지 사랑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세월은 얄궂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 존재다. 청춘을 앗아가지만 교훈을 가져다준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가 꺼내야 할 두 마디, 아마도 그것은 ‘미안하다’ ‘사랑한다’ 아닐까. ‘혹시 그대 있는 곳 어딘지 알았다면/겨울밤 별이 돼 그대를 비췄을 텐데’ (‘눈의 꽃’ 중).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