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이화인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한없이 사랑했던 선생님

주왕호(1953∼2014)

1987년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담임 선생님으로 우리 교실에 들어오신 분은 키가 많이 작으시고 귀여운 인상을 지니신 한문 선생님이셨다. 그 당시 시대적 정서가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사람의 외모를 비하하는 농담이 흔했던 시절, 선생님의 유난히 작은 키와 독특한 성함은 학생들과 다른 동료 선생님들의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선생님은 늘 허허 웃으셨지만, 담임 선생님으로 만난 주왕호 선생님은 무척 까칠하셨다. 매일 아침, 공부한 흔적이 잔뜩 담긴 A4 연습장을 양면으로 가득 채워 제출해야 했다. 공부하는 습관을 무조건 들이려고 하셨던 것이다. 한번은 등교하자마자 무성의하게 이런저런 단어를 형식적으로 마구 써서 제출했다. 우리 반이 67명이었는데 점심시간에 선생님께서는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내 연습장에 독일어로 ‘Hallo’가 가득 쓰여 있는 것을 지적하시며, “너는 Hallo를 이렇게 여러 번 쓰면서 외워야 했니? 더 어려운 단어는 없었니?” 하며 호되게 혼내셨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이후 교생실습을 위해 모교에 돌아오게 됐다. 학습지도안을 만들어 교생지도부에 제출하려고 할 때 주왕호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며 학습지도안 좀 보자고 하셨다. 1993년 당시, 손으로 뭐든 직접 쓰던 때라 초안을 연필로 작성하고 그 위에 펜으로 덧써서 곳곳에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시던 선생님은 갑자기 서랍에서 커다란 지우개를 꺼내시고는 내 학습지도안의 연필 얼룩을 말없이 구석구석 깨끗이 지워주셨다. 너무나 부끄러웠다. 내가 다시 교사가 돼 모교로 돌아왔을 때 선생님께서는 신임 교사를 평가하는 연구부장이셨다. 학교의 웃어른들에게 평가받는 공개수업을 잘하려는 욕심에 막상 학습지도안은 적은 분량으로 작성했다. 선생님은 그 학습지도안을 3번이나 퇴짜를 놓으셨다. 모교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선생님께 수시로 불려가 이런저런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교사로 가까이에서 다시 접하게 된 선생님은 회식으로 한잔하시면 그지없이 부드러워진 표정과 다정한 어조로 “선영아, 나는 이화를 사랑한단다” 하며 이화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고백하곤 하셨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아는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듯 이화를 너무나 사랑한 분이셨다. 흘러가는 세월 덕분에 나는 급기야 “선생님, 진짜 이제 약주 좀 그만하세요!” 하며 선생님께 오히려 잔소리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너 많이 컸다!”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늘 묵묵히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시던 선생님께서는 교감으로 재직 중이시던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던 그 무렵, 지병으로 갑자기 소천하셨다. 매년 4월 주왕호 선생님 기일 즈음에 이화여고에서는 주왕호 선생님 기념식수 앞에 모여 동료 교사들끼리 간단히 추모예배를 드린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인원수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 학교에 선생님을 기억하는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나도 언젠가 학교를 떠날 날이 올 것이다.

이선영 이화여고 독일어·영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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