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LED에 흐르는 한강의 詩… 문장, 설치미술이 되다

  • 문화일보
  • 입력 2019-12-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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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제니 홀저의 로봇 LED 사인 ‘당신을 위하여’. 한강과 김혜순 작가 등의 시가 흘러내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설치미술가‘제니 홀저展’
포스터·돌조각 등에 전시


“PROTECT ME FROM WHAT I WANT.(내 욕망에서 나를 지켜요)”

제니 홀저가 1987년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띄운 메시지였다. 욕망과 사치로 물들어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촌철살인’의 문장이었다. 이 작품으로 전쟁과 폭력, 정치적 억압, 죽음과 에이즈 등 사회에 대한 비판적 텍스트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개념미술가’ 홀저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커미션 프로젝트(신작 의뢰) ‘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 전이 열리고 있다. 포스터, LED, 돌 조각 등 여러 매체로 구성된 ‘설치 작품’ 3점을 미술관 실내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선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 ‘서울 박스’에 설치된 로봇 LED 사인 ‘당신을 위하여(FOR YOU)’(2019). 16m 높이 천장에서 내려온 길이 6.4m 기둥 각 면을 둘러싼 LED 화면에는 작가 한강의 시 ‘거울 저편의 겨울 11’이 흐른다.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한강 작가와 함께 ‘나는 이제 저 여자와 살아가는 불행을 견디지 않기로 한다’ 등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 속 시귀를 비롯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에밀리 정민 윤, 호진 아지즈 등 현대 문학가 5명의 텍스트가 흐른다.

가로 37m, 세로 9.4m의 서울관 로비 벽면도 작품이 됐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언어를 매체로 탐구하면서 만든 초기작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 포스터 1000여 장이 벽면을 채우고 있다. ‘선동적 에세이’ 시리즈 25개 중 12가지를 각기 다른 색으로 표현했고, ‘경구들’ 시리즈 포스터에는 문장 240개를 발췌해 한글로 번역해 놓았다. 한글 포스터 작업에는 안상수(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PaTI·날개)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도 참여했다. 또 과천관의 석조 다리 위에는 ‘당신은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다’ 등 작가가 선정한 11개의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을 새긴 결과물들을 볼 수 있다.

홀저는 1970년대 후반 격언, 속담, 잠언 등의 형식으로 역사 및 정치적 담론, 사회 문제를 주제로 직접 쓴 경구들(Truisms)을 뉴욕 거리에 게시하면서 텍스트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티셔츠, 모자, 명판부터 석조물, 전자기기, 건축물 그리고 자연 풍경 등에 언어를 투사하는 초대형 프로젝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홀저는 1990년 제44회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 작가로 선정됐으며 같은 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전시는 내년 7월 5일까지.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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