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 자유를 박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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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배신 /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경훈 옮김／책과함께

인류 정착 뒤 농경 시작됐지만
국가가 출현하면서 이동 제한
집약 노동에 무거운 세금 강요
잦은 전쟁과 전염병도 큰 고통

400년전만해도 인류 3분의 1
수렵·목축·농업통해 식량확보
야만인의 삶 외려 편했을수도
국가없이 이어온 인류史 실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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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제임스 스콧 예일대 석좌교수는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로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정치학자다. ‘조미아’는 “최근까지 국가의 흡수를 모면해 왔던 동남아시아 민족들”의 이야기다. 국가에 길든 이들은 국가 바깥의 삶이 어려울 것처럼 여기지만, 이들의 존재는 인류의 삶이 국가 없이도 이어져 왔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문제의식을 넘겨받아 이 책은 인류의 초기 정착 생활과 국가의 탄생을 둘러싼 상식을 무너뜨린다. 흔히 ‘수렵 채집→농경→정착→잉여생산→국가의 탄생’ 순서로 문명이 성립됐다고 여긴다. 정착과 농경은 굶주림을 정복하고 야생의 위험을 물리쳐 온 인류 문명의 위대한 한 걸음이요, 국가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 계약의 궁극적 형태로 여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꾸준한 발굴 성과와 선사학·고고학·인류학·진화생물학 등의 최신 연구 결과는 이러한 상식이 국가주의에 중독된 허구라고 말한다.

저자는 농경을 “호모사피엔스가 전체 환경을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로 조성”하려는 노력, 즉 비버가 댐을 짓는 것과 같은 ‘생태적 지위 구성 과정’의 장기 지속 연속체 중 하나로 본다.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길들여 자신이 좋아하는 환경으로 바꾸고, 그 환경에 몸을 맞춰 가는 강화 과정은 인류사의 중심 서사다. 저자는 인류세(人類世)가 40만 년 전 불을 길들이면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불을 놓아 숲을 태우는 식으로 식량을 얻자 내화성 식물이 득세하는 등 지구에 인류의 흔적이 처음 남은 것이다. 1만4000년 전 식량을 좇아 이동하며 살던 인류는 습지의 비옥한 땅을 만나자 드문드문 정착을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 식물을 길들이는 재배와 동물을 길들이는 가축화가 나타난다. 1만 년 전에서 8000년 전 사이에 밀·보리·쌀 등 원초적 작물이 재배되면서 농경이 시작된다. 상식과 달리, 농경이 정착을 낳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착이 농경을 낳았다.

국가도 농경이 시작된 후 곧장 나타나지 않았다. 흔히 대규모 관개 시설 구축을 국가 발생의 이유로 든다. 사실이 아니다. 관개 시설은 국가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국가가 출현한 것은 약 5000년 전이다. 농경이 시작된 지 4000년 만이다. 기나긴 시간 간격은 농경과 국가의 등장 간의 관계가 연속적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일단 생겨난 후에 국가는 권력 기반을 이루는 잉여생산을 늘리려고 정착을 강제하고 농경을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물론 일이 술술 풀린 것은 아니다.

국가가 출현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인류에게는 정착보다 이동이 매력적이었다. 국가가 주도한 농경은 자유의 박탈과 함께 집약적 노예 노동과 무거운 세금을 불러왔다.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공격과 수비에 필요한 징병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좁은 지역에 과밀하게 몰려 살면서 생겨난 전염병이 문제였다. 인간과 가축과 작물이 함께 살아가자 인수공통전염병이 나타나고, 홍역·볼거리·디프테리아 등 이전에 볼 수 없던 질병이 창궐했다. 농경을 통해 풍요를 이루고 살림살이가 나아지기는커녕, 인간은 꼼짝 못 하고 작물과 가축을 돌보는 집사가 됐을 뿐 아니라 세균과 박테리아 등 병원균의 노예로 전락했다. ‘농경의 배신’이다. 이런 상태라면 누가 국가에 예속돼 기꺼이 농사를 지으려 하겠는가. 국가가 포로를 노예 삼고, 다음으로 여성을 집 안에 가두고, 결국에는 인간 전체를 움직이지 못하는 정착 상태로 길들인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틈만 나면 성벽을 탈출해 상대적 평등 사회에서 자유를 즐기려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국가 바깥의 존재인 야만인의 침입을 방어하는 목적을 수행하는 동시에 국가 질서에 포획된 속민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작용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400년 전만 해도 인류의 3분의 1은 수렵·채집, 목축, 독립 농업 등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며 국가에 속하기를 거부했다. 소수 권력자는 몰라도 대다수 인류한테 국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까웠다. 고대 그리스 국가의 붕괴 직후처럼 역사상 몇 차례나 ‘국가 없는 암흑기’가 출현했는데, 그때마다 인류 전반의 복지는 오히려 나아졌다. “국가 바깥에서 살아가는 야만인의 삶이 문명 내부에서 살아가는 비지배계층의 생활보다 물질적으로 더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경우가 많다”면, 도대체 정착해 농사짓고 국가를 이루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역사를 문명, 즉 국가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진실을 놓치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 정착과 비정착 사이에는 경쟁과 협력, 교류와 분쟁이 한없이 이어졌다. 인류는 대부분 양쪽을 오가면서 혼합 형태로 살아갔다. 평화와 풍요가 넘치면 모여들어 함께 살고, 역병이 돌거나 흉년이 들면 야만으로 돌아갔다. 저자는 말한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한다든지, 화전으로 농사를 짓는다든지, 해산물을 수집하는 경우처럼 생계가 몇 가지 먹이그물에 걸쳐 있으면 국가가 형성되기 어렵다.” 솔직히 이러한 경우에는 국가가 필요 없다.

따라서 ‘국가=문명’과 ‘비국가=야만’의 이분법은 옳지 않다. 인류는 국가 없이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국가의 속민이 인류의 존재론적 필연은 아니다. 행복을 보장하면 곡물을 먹으며 국가에 속할 수 있고, 수틀리면 무너뜨리고 싫으면 탈출해서 곡물에 반하는 삶을 구축할 수 있다. 저자는 역사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상상할 가능성을 발굴해 ‘대항 서사’를 이룩하는 작업을 훌륭히 해냈다. “어디라도 좋다.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의 시구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구절이 떠올라 즐거웠다. 392쪽, 2만2000원.

장은수 이감문해력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