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한글날이 아빠 기일… 아이들도 다 기억해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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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1940∼2019)

아빠 거기는 안 추워? 여기는 요새 겨울답게 추워. 거기로 간 지 벌써 두 달이 넘게 지났네? 시간은 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거기도 시간 빨리 지나가?

아빠는 복도 많아. 그곳으로 간 날이 한글날이라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우리 애들도 아빠 생일은 기억 못 해도 아빠 기일은 다 기억해. 이제 우리 집에서는 한글날이 아빠 생각하는 날이 될 것 같아, 흐흐.

아빠 생각하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 아빠, 그거 생각나? 나 초등학교 때인 거 같은데, 소풍 가기 전날 엄마가 아파서 아빠가 김밥 재료 장 봐와서 김밥 싸줬던 거? 얼마나 가슴 졸였던지 그때는. 혹시 김밥 못 가져갈까 봐. 그러고 보니 아빤 엄청 시대를 앞선 남자인 거 같아! 나 중학교 간 이후로는 아빠가 밥 더 많이 차려준 거 같은데?

여름이면 텐트, 코펠, 이불 싸서 강릉, 속초 등으로 버스 타고 캠핑 갔던 거, 거기서 언니 잃어버려서 온 해수욕장을 다 헤매다녔던 거, 밤에 공부하는 줄 알고 초콜릿 사다 준 거, 엄마 몰래 옷 사달라는 거 같이 가서 사준 거, 흐흐, 엄마 몰래 용돈 주다가 걸려서 혼난 것도….

수능시험 보러 들어갈 때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아빠 얼굴, 결혼식 전날 밤에 아빠 손 잡고 결혼식 예행연습한 것도 생각나네. 결혼하고 나서 애들 하고 놀아 준 것도….

요새 난 애들 학교 공부시키고 집안 살림하느라 정신이 없네! 대입제도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말이야, 애들 공부해서 대학가는 건지 부모들 정보력과 정성 테스트해서 대학가는 건지 모르겠어.

그리고 애들 아빠는 왜 이렇게 맨날 늦게 들어오는지, 하긴 일찍 와서 밥 차려달라, 애들 공부는 하냐, 뭐 이런 잔소리 하는 거 보다는 좋은 거 같아.

아빠! 나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아빠 속상하게 안 했지? 요새 애들은 자기 잘되라고 하는 이야기가 잔소리로만 들리는 모양이야. 말만 하면 짜증을 내! 확 그냥….

옷도 말이야, 내가 사준 건 잘 안 입고 자기가 직접 고른 것만 좋다고 계속 입고 다니고 말이야, 내가 사준 게 훨씬 좋은 건데 말이야, 흐흐.

근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나도 아빠 말 참 안 들었던 거 같은데, 공부하라고 해도 짜증만 내고, 운동 좀 하라고 해도 잔소리로만 받아들여서 아빠하고 한동안 말을 안 하기도 하고….

흐흐, 옛날 속담에 자식 키워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하더니만, 내가 딱 그러네. 이제야 그때 아빠가 왜 그랬는지 이해도 되고, 내가 아빠한테 왜 그렇게 짜증을 냈는지 후회도 되고. 아빠 말 좀 잘 들었으면 지금보다 더 잘살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빠! 난 지금도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 이게 다 아빠 덕분인 거 같기도 하고. 진즉에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야 나도 철이 나는 모양이야. 아빠 있을 때 고맙다고 말 안 한 게 후회되기도 하고, 근데 뭐 자식들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아빠가 이해해. 나도 우리 애들한테 제대로 이해 못 받고 있는데 뭐, 흐흐.

자꾸 아빠 생각나서 어떡하지? 아빠도 거기서 나 어떻게 사는지 계속 잘 지켜보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줘, 뭐 가끔 용돈도 좀 주고, 흐흐.

아빠!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밥도 잘 먹고, 건강하고, 우리 잊지 말고 알았지? 우리도 안 잊을게. 한글날 봐 아빠, 안녕.

셋째 딸 이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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