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그 깊은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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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내 시작’ 증명하려 온 힘
25년 동안 누렇게 변한 책

펼치자 깊은 순간 열리듯
살아 움직이는 시간의 세계

부족하고 보잘것없어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서류 맨 앞에 작가 등단 연도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이미지를 붙여야 할 상황이 생겼다. 이 성가신 일을 꼭 해야 하나. 이 구태의 방식이 왜 아직도 중요한 절차로 남아 있을까. 그간의 경력으로는 작가로서의 신뢰가 부족한가. 이사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가진 책들을 내 편의에 맞게 정리하지도 못했으니 어디를 뒤져야 할지 난감해서 이 상황을 피하고 싶기만 했다.

그 오래된 계간지를 찾으려면 이 방 저 방의 책들을 일일이 살펴야 할 판이었다. 그걸 잘 보이게끔 꽂아둔 적이 없을 만큼 나의 데뷔는 번듯하지 못했다. 사실상의 데뷔작은 일등이 아니라서 지면에 실리지 못했으니 아예 증명할 근거랄 게 없고, 계간지 데뷔는 영 내키지 않는 속사정이 있어 단 하나뿐인 책마저 깊숙이 밀어 넣고 꺼내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꺼낼 이유도 없었다.

그것을 찾으려니 책이 아니라 책 틈을 살피는 기분이었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이미지가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뒤지는 기분. 버린 적은 없으나, 아직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확신 또한 없었다. 거의 모든 책을 몇 차례나 훑고 허탕 치면서 아무래도 못 찾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성가신 일 또한 포기가 됐는데, 그런데도 온종일 그 짓을 그만두지 못했다.

이상한 불안감이 스쳤던 때문이다. 나의 작가 생활 시작을 증명할 근거가 없다. 갑자기 그 ‘계간지’로 데뷔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그런 망상을 조작하고 믿어 버렸던 게 아닐까. 조작이라면 왜 하필 기쁨보다 좌절이 컸던 기억이란 말인가. 부실했던 시작마저 진짜가 아니라면 어쩌나. 이따위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찾아야만 했다.

우습게도 나는 나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데뷔 증명서를 찾는다는 성가신 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억의 증거, 내 시작을 확인하고자 가여운 신경전을 끝내지 못했다.

분명히 놓친 게 있으리라 믿고 눈을 새롭게 뜨고 책들의 틈을 보고 또 보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내게 읽지도 않은 책이 너무 많구나. 저쪽 방에서 본 책이 이쪽 방에 또 있구나. 아까는 못 본 책이 버젓이 여기 있었구나. 강연에 필수 자료라 찾느라고 애를 먹었던 책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기도 했다. 왜 나는 읽어야 할 것들을 이렇게 자주 놓치고 있었을까. 이 좁은 공간에서 번번이 길을 잃었음을 알겠다. 내가 책들의 무덤에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알았다.

다행이다. 드디어 찾아냈다. 25년 동안 누렇게 변한 책. 그것은 오래된 서류 밑에서 책등이 돌려진 채 흡사 엎드린 것 같은 모양으로 발견되었다. 나는 지쳐서 널브러진 채 비로소 안심했다. 이 얄팍한 것에 간절히 매달린 시간을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비로소 안심이 되는 이 감정은 또 뭘까. 분명한 것은, 부실하나마 내 시작이 가짜가 아니었다는 사실.

쩍 소리와 함께 벌어지는 책에서 오래된 냄새가 풍겼다. 외면당한 시간에 항의라도 하듯 노기 띤 뻣뻣함. 그것은 자신의 건재함을 묵은 질감과 냄새로 먼저 각인시켰다. 한자가 드문드문 섞인 고집스러운 인상의 책을 들어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새 책엽을 넘기다 손을 베이곤 할 때마다 그 섬뜩함을 책의 거부, 책이 가진 오만함, 혹은 진입의 부담 따위로 느꼈는데, 여기에는 그게 없다. 뻣뻣하나 함부로 날을 세우지 않는다. 세월을 먹어 두툼하게 느껴지는 종이와 익은 색감이 정겹다. 오래전 떠났던 집처럼.

어둡고 깊은 순간이 열리는 듯했다. 색 바랜 지면 한쪽에 아직 주름살 없는 화안이던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서른 몇 살의 나를 그렇게 마주했다. 손톱만 한 사진의 표정에는 그걸 찍을 때의 감정이 담겨 있었고, 그것은 흑백에 정지 상태일망정 오롯이 그 순간의 진실이었다.

문득 새해를 시작하며 보았던 첫 영화 생각이 났다. 잃어버린 딸 때문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기억의 일부가 묶여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소중한 기억은 시간 속에 새겨졌음을, 시간은 흐르고 모든 기억은 이어져 있음을 섬세하게 담아낸 영화처럼 나의 어떤 시작이 얄팍한 책 한쪽에 새겨져 있음을 새삼 알았다.

여전히 나는 어떤 증명을 위해 이런 자료를 소환해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나는 다만 책의 생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펼치는 순간 살아 움직이는 독자적인 시간의 세계. 여러 꼭지 중 일부에 불과했으나마 나의 어떤 순간이 분명히 살아 있는 단 하나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어서 안심이다. 내 시작이 이토록 부족하고 보잘것없음을 확인시키는 근거인 것만으로도 이것은 가치가 있다. 한 권뿐이라 더 애틋하다.

언젠가, 누가 묶어서 내다 버린 책더미를 끌어들인 일이 있다. 양장 상태가 골동품이랄 수 있는 거였는데, 종이 값으로 처분되기에는 아까울 만큼 깨끗하고 못 읽어 본 제목이 끌리기도 해 읽고 버리자 생각했다. 어렸을 때, 집에 전집이 갖춰져 있던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런 전집류라서 더 마음이 동했고, 늦었지만 그 미련을 이렇게 푸는구나 싶기도 했다.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읽어냈다. 시대를 말해주는 옛날식 표기법, 고르지 못한 행간, 촌스러운 그림 배치에 웃음이 났는데, 읽을수록 버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버려지는 순간 소멸인 책. 이런 책을 또 어디서 만나겠는가.

책에서 얻는 것은 내용이다. 하지만 때로는 내용 그 이상의 의미를 건져낼 수도 있다. 막막하던 시절에 언어유희의 맛을 알았던 나를 만나서 다행이다. 언어 직조의 즐거움. 그 힘으로 지금 여기에 있다. 내 시작의 증명은 아마도 초심을 잊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