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경에 비친 진짜 나… ‘느린 풍경’으로의 초대

  • 문화일보
  • 입력 2020-02-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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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선두 화백의 ‘느린 풍경-완도길’(장지에 먹·분채, 148×213㎝, 2019). 차를 운전하다 굽은 길을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반사경을 살핀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비로소 주위의 ‘느린 풍경’이 펼쳐진다. 그림 하단에 반사경이 보인다. 학고재 제공


- 김선두 화백 학고재서 개인전

빨간 신호등·유턴 표지판
잃어버린 자아 찾기 메시지

서정적 아름다움·조형미
사람과 자연의 조화 담아


바쁜 현대인들에게 ‘느림과 여유’란 어떤 의미일까. 한국화가 김선두 화백이 대표적인 연작 ‘느린 풍경’ 작품들을 들고 서울 삼청로의 학고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김 화백은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온 대표적인 동시대 한국화가다. 그는 바탕 작업 없이 색을 중첩해 우려내는 ‘장지화’로 일본, 중국의 채색화와 구별된 독자적 화풍을 발전시켰다. 장지 위에 분채를 수십 차례 반복해 쌓다 보면 김 화백 특유의 깊은 색이 서서히 빛을 발한다. 촘촘하고 튼튼한 장지가 물감을 머금어 발색이 곱고 그윽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것은 그 같은 장르적 기법 외에 그림에 담고자 한 김 화백의 철학이다.

누구나 차를 운전하다 굽은 길을 만나면 속도를 줄이고 도로변의 반사경을 살핀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이다. 그제야 비로소 주위의 ‘느린 풍경’이 시야에 잡힌다. 김 화백이 캔버스에 표현하고자 하는 ‘순간’이다. 전시장의‘느린 풍경’ 연작 7점에는 하나같이 풍경 하단부에 지나온 풍경을 되비치는 도로의 반사경이 그려져 있다.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0대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옆에 선 김선두 화백.


“삶에도 이러한 순간이 필요하겠죠. 가끔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 서야 지나칠 뻔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직진을 방해하는 신호를 만나야 쉬어갈 수 있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김 화백의 설명이다. 갤러리의 한쪽 벽을 꽉 채운 대작 유달길(142×900㎝)에도 역시 반사경이 그려져 있다.

이뿐 아니다.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과 유턴 표지판을 그린 ‘나에게로 U턴하다’도 ‘잃어버린 내게로 유턴해 돌아가자’는 소리로 들린다. 작가가 오랜 기간 그려온 ‘별을 보여드립니다’ 연작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별은 낮에도 떠 있지만 ‘빛’이라는 현상에 가려진 만큼 빛을 걷어낸 자리에 빛나는 ‘낮별’, 즉 진실을 함께 보자는 권유로 들린다. 여기에 60대의 화백이 20대의 자신을 그린 자화상 ‘행-아름다운 시절’은 부릅뜬 눈에 또렷한 윤곽선, 날카로운 콧날 때문인지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미술평론가 김백균 중앙대 교수는 “작가가 가장 경계해온 것이 감각의 둔화인데 멈춰 서 바라보는 반사경, 지나온 길로 돌아가는 유턴, 아름다움의 절정이었던 20대의 자화상, 빛 속에 가려진 낮별의 재발견, 그런 것들은 모두 멈춤이나 느림, 일탈과 전위를 통해 (예민한 감각으로 되돌아가) 사물에 숨겨진 진실을 보려는 작가의 열망과 맞닿아 있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김 화백의 작품에는 그만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조형미가 여전히 살아 있다. 뾰족한 직선 대신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표현된 화사한 색감의 들판에서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바라만 봐도 마음이 밝아진다. 그림에서는 철조망조차 시(詩)처럼 구부러져 있다.

김 화백의 개인전만 모두 4차례 개최한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그림이 바로 김 화백 같아요. 고향도 전남 장흥이지만 작품에서 남도의 황토 빛 들녘이 보이는 것 같고 남도 창(唱)도 들려옵니다. 화백의 성격인 온화함과 질박함이 그림에 그대로 살아 있어요”라고 말했다.

김 화백은 현재 중앙대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소설가 이청준의 전집과 김훈의 작품 남한산성 표지화를 그렸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의 그림 대역을 맡아 대중적 인지도를 쌓기도 했다. 지난해 제68회 서울특별시 문화상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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