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스스로 결정하라’… 40년 지난뒤 깨달은 신부님 가르침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운데 모자 쓴 이가 안병태 알퐁소 신부님.

안병태 알퐁소 신부님(1931~1994)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20대 후반의 아들이 뭐든 도움이 되고자 하는 아비의 집요한 질문에 아무런 실마리도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서운함과 허탈함이 이어지다가 같은 시기의 나에게는 어디서, 누가 위로가 돼 줬는지 돌이켜 보게 됐다.

대학의 학기 말 시험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요즘과 같은 시기에 ‘삼각산에 가자’는 학생회 지도신부님의 호출이 있었다. 일요일 늦은 아침에 학교에 모이면, 출발에 앞서 신촌의 쇼핑센터에 들러 소주와 토닉워터 그리고 먹거리로 옥수수 강냉이 자루를 사서 나눠 들고 평창동 주택가를 지나 북한산 자락에 오른다. 정상에는 가고 싶은 사람만 갔다 오면 되는 산행이다. 산에 오르다 평평한 자리를 찾아 식사를 하고 소주에 토닉워터를 섞어 강냉이 안주에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프로그램의 핵심이었다. 1980년대 초, 나이와 경험에 비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거두절미하고 세상에 묻고 싶은 것들을 토해내고 있는 우리 얘기를 참견 없이 들어 주시던 신부님이 그 자리의 주선자였다. 논리에 논리로 덧칠하며 실마리를 찾다가 지친 우리가 스스로의 열기에 못 이겨 모닥불 주변에서 서부영화의 인디언 춤을 흉내 내며 소리를 질러댈 때, 미소로 지켜보시던 신부님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신부님도 들어오시라는 청에 못이기는 척하며 무리에 섞여 인디언 춤을 함께 추시던 신부님의 마음이 새롭게 해석된다. 보름간의 대학생 농촌봉사활동을 함께하시면서 초등학교 교실 바닥에 앉아 큰 솥에 남은 밥과 찬을 뒤섞어, 잔반을 먹어서 처리하던 미련퉁이들을 말없이 환한 미소로 응원(?)해 주셨던 신부님이다.

선배들은 ‘고통의 신비’로 요약해 ‘안고통신부님’이라는 별칭을 알려줬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물어는 봤지만 ‘아하!’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모든 사안에 너무도 진지한 그분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진지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학생들에게 부어 넣으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피력하고 서로 위로받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셨던 신부님이다. 신부님이 묵묵히 들어주신 덕분에 우리가 스스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됐다. 섣불리 무슨 말이라도 해주려고 조바심 내는 아비를 무심한 듯, 실마리 하나 남기지 않고 돌아서는 아들의 뒷모습을 통해 불현듯 깨닫게 된 신부님의 가르침일지 모른다.

한국예수회의 두 번째 지구장이자, 학교법인의 재단이사장이셨지만 나와 내 동기생들에게는 학생회의 지도신부님으로 선명한 기억을 남겨주신 존재이시다. 신부님은 외부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 인사도 아니었고 수도회나 학교 안에서 현란하게 모습을 드러내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신부님이 지도하는 우리에게는 분출의 기회와 자기표현의 장을 의심 없이 내어 주시고 바라봐 주시는 아빠였다. 1994년 11월의 어느 날, 대만 회의에 참석하셨다가 선종하신 신부님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불행 중 나의 행운이었는지 마침 김포공항에 여권 없이 귀국하신 신부님의 시신을 수습해 모셔오는 일행에 합류하게 돼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요한! 고등학교 입시가 없어진 첫해의 77학번과 대학본고사가 사라진 첫해의 81학번은 다른 학번들과 뭔가 달라.” 안병태 신부님이 언젠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차이를 몸소 겪으신 신부님의 철학이 반영돼서였을까? 검은색 뿔테안경 너머 진지한 표정의 신부님은 우리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귀를 열고 들어 주셔 마침내 우리에게 스며드셨다.

PS. 제대 후 용인 예수회원 묘지에 모신 신부님을 딱 한 번 찾아뵀다. 글을 통해 신부님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다 보니 올 한식 즈음에 다시 찾아봬야 할 것 같다.

이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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