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건축연구소 겸 집무 공간인 ‘이로재(履露齋)’ 건물 계단에서 포즈를 취한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이로재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1993년 그의 집 ‘수졸당’이 지어졌을 때 승 위원장에게 답례로 준 현판에 새겨져 있던 글귀다(위). 승 위원장은 건물을 설계할 때는 산과 계곡 등 지형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아래). 김선규 기자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간주
건축 생산량만 세계 상위권
발주때 비용낮게 써내야 선택
시스템은 아직도 미개한 수준
아테네 바닥에 유적 파편 깔아
스토리 입히는 감성 건축 실현
땅의 역사에 대한 이해 깊어야
지속가능한 건축 설계 완성돼
승효상(68)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건축가다. 1992년 ‘빈자의 미학’을 선언한 이래 그의 건축 철학은 한국 건축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수졸당, 수백당, 웰콤시티 사옥, 부산 구덕교회, 전통불교문화원 등의 작품은 여전히 수많은 건축 관계자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와 함께 서울시 총괄건축가,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등을 역임하며 우리 사회에 ‘올바른 건축’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하는 일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는 현장을 누비며 “좋은 건축은 좋은 삶을 만든다. 좋은 건축으로 세계가 조금은 진보할 수 있다”고 늘 주장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벌어졌을 때 전문가들은 기둥과 하부골조가 보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무리한 증축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건축가는 그 같은 초석 다지기부터 잘해내는 전문가일 것이다.
지금 나라 상황은 결코 밝지 못하다. 정상회담으로 훈훈했던 남북관계는 차갑게 식었고, 소상공인들의 아우성에서 알 수 있듯 경제는 위기상황에다가 얼마 전부터는 중국에서 유입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으로 나라 전체가 뒤숭숭하다. 국민의 ‘좋은 삶’을 위해 건축분야에서 그가 다지고 있는 초석은 무엇일까.
우리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등 아카데미상 4관왕에 올라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지난 10일 건축연구소 이로재(履露齋)에서 승 위원장을 만났다.
승 위원장과의 대화는 당연히 이날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할리우드 시상식장에서 전해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을 비롯해 4관왕에 올랐다는 소식에 대해 소감을 나누는 것으로 시작됐다.
“대단해요. 가슴 떨리는 일이에요. 우리의 문화적 저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어요. 우리는 진짜 앞으로 정치만 잘하면 될 것 같아요.”
―건축가인데 영화 속 주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요.
“영화 속 반지하의 집은 1960년대 말 유행했던 집입니다. 경제 개발로 돈이 돌자 많은 사람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식의 ‘비둘기집’ 같은 유행가 가사 속의 집에 살게 됐죠. 그때 테라스를 둔 서양식 집이 등장하면서 테라스 아래 반지하 방이 생겼어요. 원래 어떤 문화권에서건 집은 잘 바뀌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1970년대 혁명적으로 바뀌었어요. 그 같은 상황을 세트로 잘 표현했습니다.”
―할리우드 시상식이 그동안 ‘집안 잔치’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 같은 비판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상은 항상 자기네들 서양문화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프로파간다적 성격의 행사였는데 이번에 방향을 튼 것 같아요. 서양의 경계 바깥에도 다른 존중받아야 할 삶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신호로도 보입니다. 2000년도 베니스비엔날레 표어가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이다’였어요. 그동안 서양은 오브제 중심의 미학을 추구했죠. 스펙터클함도 그래서 나왔고요. 반면에 우리는 사람 사이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 윤리와 내용을 중요시했고요. 그런데 1960년대 들어 우리는 윤리를 버리고 서양 미학만 좇아갔어요. 어떻게 보면 기생충의 아카데미상 수상은 서양이 21세기에 들어서 보니 윤리가 더 맞는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같은 상황이 우리 건축문화에서는 어떻게 구현돼 왔는지요.
“전 시대의 개념인데요. 우리도 그랬지만 서양에서는 세우는 자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혹은 치적을 만들기 위해 랜드마크 같은 건물을 짓거나 그랬어요. 건축을 오브제처럼 보는 거죠. 숭배 대상이나 과시 대상으로 봤어요. 건축의 본질은 그런 드러난 모양이 아니에요. 그 같은 개념은 건축의 본질을 벗어나요. 그런 건축은 파편화될 수밖에 없거든요. 혼자만 잘나서 서 있게 되니까요. 그런 것이 많은 도시일수록 파편적 도시고요. 연결이 안 되니까 시민의 공존과는 거리가 멀죠. 그간 몇 십 년 동안 서울을 그렇게 만들어왔어요.”
―그러면 우리 본래의 건축은 어떻게 다른가요.
“집을 지을 때 우리는 마당 중심입니다. 집은 마당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 집을 통해 마당하고 대청 너머 뒷마당과 연결합니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매개체죠. 그러나 서양에서는 집을 오브제로 여겨 신전처럼 지어요. 남을 지배하려는 듯 우람하게 만듭니다.”
이 같은 말을 하며 승 위원장은 김원일 작가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한 대목을 읽어 주었다.
“학교와 대구일보사로 맥 빠진 채 나다니던 4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 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김원일 ‘마당 깊은 집’, 문학과지성사 1991)
승 위원장은 6·25전쟁 때 북한에서 피란 나온 일곱 가구가 깊은 마당을 두고 모여 사는 집에서 태어났다. 부산 구덕산 기슭 밑에 지어진 그 집은 소설 속 ‘마당 깊은 집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화장실과 우물이 하나씩 있어 매일 북새통에 긴 줄이 늘어섰다. 그의 건축 철학으로 항상 거론되는 빈자의 미학도 어려서의 그 같은 삶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2018년 4월 승 위원장은 국가건축정책위원회(국건위) 위원장으로 선임됐다. 국건위는 대통령 소속 위원회로서, 민간 위원장을 포함해 민간위원 19명과 기획재정부 장관 등 11개 부처 장관 등 총 30명으로 구성돼 국가 건축정책의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관계 부처 건축정책을 심의·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승 위원장은 5기 위원장으로 지명됐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우리의 ‘건축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발주-설계-시공’ 전 과정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법안 개정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고 설명했다. 김선규 기자
“산·계곡 있으면 있는대로… 3기신도시, 자연에 맞춰 입체적 설계”
국건위‘3기신도시 건설’자문
주택정책 아닌 주거정책 접근
수요자 중심 도시이미지 조성
주민센터·파출소·복지시설…
매일 보는 공공시설이 예뻐야
일상이 즐겁고 국민이 행복
우리의 풍경 바꿔놓은 아파트
예전엔 돈 없어서 만들었지만
소득 올라도 천편일률 디자인
정치인 지자체장들 건축 몰라
공공건축물 체계적 관리 위해
총괄건축가제 전국 도입 추진
국건위 위원장은 그간 건축계에 발을 내디딘 후 주장해온 빈자의 미학을 정책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자리다. 그에게 빈자의 미학에 대해 먼저 얘기를 들어보았다.
―빈자의 미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빈자를 위한 미학이 아니라 빈자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미학입니다. 돈의 힘으로 살지 말고 절제하고 공유하면서 함께 공간을 나누며 살자는 얘기를 한 것이죠.”
―빈자의 미학이라는 철학이 탄생한 배경이 서울 금호동 달동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릴 적 달동네에서 살았는데 달동네가 참 오묘한 곳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두루 나누며 살아야 하고,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길에서 공공생활이 영위되고 공공성이 대단합니다. 파편적이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죠. 건축가로서 독립한 후, 내가 어떤 건축을 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에 금호동 달동네를 찾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빈자의 미학이 탄생한 배경이다. 승효상은 1996년 1월 영국의 한 건축학교에 초청받았을 때 강의용으로 ‘빈자의 미학’을 썼는데, 이 책이 팔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됐으며 한때 절판됐다가 2016년 박노해 시인의 강력한 권유로 복간했다. 대화는 다시 국건위 이야기로 돌아왔다.
―우리 건축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의 건축 생산량은 세계 상위권입니다. 중국 다음이며 밀도로 치면 1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건축은 아주 하위에 속해 있죠.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건축에 대한 관념입니다. 건축을 부동산으로 생각하고,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가 조성한 것이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요즘 좋은 건축이 나올 리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건축을 만드는 생산 시스템이 너무 미개하다는 점입니다. 이 시스템부터 먼저 바꿔야 합니다.”
―시스템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요.
“건축의 3단계 즉 설계자 선정, 발주와 설계 그리고 시공 단계 다 문제입니다. 발주할 때부터 살펴보죠. 동사무소나 파출소 등은 우리 일상과 밀접한 공공건축인데 규모가 작다고 해서 건축가를 뽑을 때 설계비를 낮게 적어내는 건축가를 선택합니다. 가격입찰제이기 때문입니다. 건축을 물건 사듯이 하는 야만적이고 미개한 정책이죠. 경제가 세계 10위권이면서 행복지수는 80위권인 이유가 다 그런 데 있습니다. 또 건축면허가 있는 건축사가 새로 집을 지을 때마다 40여 개의 심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심의위원, 공무원과 민원인 사이에 유착관계가 형성되고 부정·비리가 만연하게 되는데 문제 제기조차 안 하는 관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또 시공에 있어서도 설계한 사람이 공사 컨트롤을 못합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설계자가 직접 감리를 합니다. 우리 정부의 이 같은 정책은 애를 낳은 어머니에게 애를 못 기르게 하는 것과 같죠.”
―국건위 위원장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지.
“발주, 설계, 시공 모두 선진적으로 바꾸는 것을 추진 중입니다. 이와 관련해 건축법을 개정하고, 공공건축특별법을 제정하는 안건을 국회에 제출해 계류 중입니다. 올해 4월이 국건위 위원장 임기 만료인데 그전에 해결될지 모르겠어요.”
승 위원장은 “정부가 추진 중인 ‘3기 신도시’ 건설 과정에도 국건위가 자문하고 있다며 3기 신도시 조성과 관련, “‘주택정책’을 넘어 ‘주거정책’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가 중심이 되도록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주민 의견을 수렴하며 도시 이미지를 먼저 만들기 위해 관계기관과 협의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승 위원장은 정부가 공공건축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사업을 전문적으로 책임지는 총괄건축가 및 공공건축가 제도의 전국 도입도 추진해 왔다. 총괄건축가 제도는 공공건축물과 정비사업의 계획 및 설계 단계에 건축전문가를 투입해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공공건축물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제도다.
“지자체장은 정치인이어서 건축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요. 임기도 4년이고요. 건축을 다루는 부서도 산발적이고 통합이 안 돼 서양에서는 이 폐단을 알고서 시장 옆에 총괄 건축가(City Architect)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일관되게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서울시에서 처음으로 도입해 성과를 보았죠. 이 제도 도입을 위해 국건위에서 여러 지자체장을 만나 권유했고, 광역단체에서는 거의 다 총괄건축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승 위원장은 서울시 총괄건축가 시절 서울의 정체성, 그리고 도시에 관한 개념을 바로 세우려고 애썼다. 서울은 600년, 길게는 1000년을 이어온 도시인데 6·25전쟁 때 파괴된 이후, 주로 미국식으로 재건됐다. 정체성이 파괴된 서울의 원래 모습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보행자 중심의 걷기 편한 서울’도 많이 인식시켰다. 오스트리아 빈 등 삶의 질이 높은 도시 대부분은 보행권이 보장된 도시다.
국건위에서는 또 정부가 주민센터, 도서관, 복지시설 등 주민 생활과 밀착된 공공건축의 수준을 높이는 것도 적극 추진했다. 사업계획이나 설계 단계를 건너뛰고 획일적 형태로 짓는 일이 허다한 동네 공공건축 과정에 전문 건축가를 투입해 주민 의견을 반영하는 등 미관과 시설을 동시에 개선한다는 것이다.
“작은 공공시설이 문제입니다. 생활 사회간접자본(SOC)인데 사실 랜드마크와 일반 시민 생활과 관계가 크게 없습니다. 서울타워를 일생에 몇 번이나 갈까요. 문 열고 나가면 파출소, 동사무소, 노인회관, 아이들 유치원 이런 시설들과 매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시설들의 디자인이 다 엉망이에요. 이게 다 가격입찰제도 때문입니다. 국민이 행복하려면 이것이 예뻐야 일상이 행복한 것인데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소홀했죠. 이 같은 내용이 정부의 중요 시책으로 체택돼 생활형 SOC 작업을 많이 바꿔 나가고 있습니다.”
동숭동 골목길 언덕에 있는 승 위원장의 1층 집무실 책상 옆에는 건물의 이름이기도 한 ‘이로재(履露齋)’ 현판이 걸려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본인의 자택 수졸당을 설계해준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다. 이로재는 중국 고서에 나오는 글귀로, 효심이 깊은 선비가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실까 처소까지 외투를 걸치고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다 따뜻해진 외투를 건네드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창암 이삼만(1770∼1847)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1993년 지어진 수졸당은 승효상식 건축의 첫 번째 작품이다. 유 전 청장은 당시만 해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쓰기 전이어서 돈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승 위원장은 ‘履露齋’ 현판을 설계비의 일부로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이로재를 자신의 사무실 이름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빈자의 미학’이 얼마 전 복간되며 건축가들의 입에 다시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빈자의 미학 철학으로 볼 때 우리 사회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아파트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 도시나 국토의 풍경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여러 개의 건물이 아닙니다. 아파트단지가 우리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세월 주택 수가 부족하고 정부 예산도 없을 때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에 돈도 많고 사람들 수준도 올라갔는데 아파트를 짓는 것은 똑같아요. 여전히 선분양제도이고요. 공동주택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정부 시책에 따라 타일을 대리석으로 바꾸는 정도의 변화밖에 못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국건위에서 이와 관련해 세운 대책이 있나요.
“그동안은 단지화 중심으로 원래의 타입별로 배분해 작업했습니다. 산도 계곡도 있지만 도면으로 보고 평평하게 생각해 산과 계곡이 있으면 다 깎고 메꾸었습니다. 설계할 때 산이 있으면 산이 있는 대로 계곡이 있으면 계곡이 있는 대로 맞춰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산세에 맞게 아름다운 집단적 주거단지가 만들어지는데 인위적으로 깎아버리니 우리나라의 풍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따라서 3기 신도시에는 입체적 설계, 통합설계를 주문했습니다. 한꺼번에 생각해서 최종적으로 어떠한 풍경이 나오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먼저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승 위원장의 건축가 인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김수근(1931∼1986)과의 15년이고, 또 하나는 빈자의 미학으로 걸어온 20여 년이다. 그는 1974년부터 김수근 선생 밑에서 일했다. 그는 스승을 넘어야 할 산으로 여기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 은사님 소개로 김수근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이 1986년에 돌아가셨고 이후 3년 동안 김수근 선생님의 유언을 받아서 ‘공간’ 대표를 했으니까 15년을 김수근 선생님 문하에 있었던 셈이네요.”
그의 건축 철학인 ‘빈자의 미학’은 최근 ‘감성의 지형’으로 발전하고 있다. 어떤 점이 다른 것인지 물어보았다.
―감성의 지형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면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접근로를 보면 수백 년 된 대리석 파편부터 용도를 알 수 없는 신고전주의 석재까지 그 주변의 옛 유적 파편들을 주워 모아서 바닥에 깔아놓았어요. 굉장히 많은 스토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표정도 다 달라 보이고요. 신화와 궁전도 떠올리게 합니다. 1950년대 그리스 건축가 디미트리스 피키오니스가 아크로폴리스 주변 조경으로 만든 지형(地形)입니다. 1989년 그의 작업은 ‘감성의 지형(sentimental topography)’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되고 책으로도 나왔습니다. 그 현장 자체가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빈자의 미학과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빈자의 미학에서 건축 선언을 했는데 당시에는 내용이 그리 풍부하지 못했어요. 건축의 개념을 만들고 증명하기 위해 많은 작업을 하면서 보충했죠. 그 와중에 건축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서건, 전쟁에 의해서건 무너져도 확실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땅에 스며들어서 무늬를 만들어내죠. 바로 그것이 감성의 지형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근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30년 동안 해온 건축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욕이 생겨났습니다.”
―건축의 양태가 바뀌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더 강화되는 것 입니다. 모든 땅은 어떤 건축이 되고 싶은지 늘 요구하고 있어요. 땅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설계를 안 하려고 합니다. 땅에 관한 추적이 필요합니다. 다큐멘트, 사료도 많습니다. 사대문 내에는 지하를 파보면 옛 흔적이 다 나와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죠. 다른 사람이 산 흔적 위에 우리가 다시 사는 것 아니겠어요. 역사의 무게를 느끼며 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역사가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입장에서 건축을 설계하고, 기억하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충분히 지속가능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 = 이경택 문화부 부장 ktle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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