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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주철환의 음악동네 게재 일자 : 2020년 02월 21일(金)
희망 준 봉준호처럼…‘이 풍진 세상살이’ 달래준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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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원·이찬원 ‘희망가’

오늘 음악동네는 문학과 역사, 지리와 영화를 들락날락할 참이다. 서고에서 1930년대 소설집을 다시 꺼낸 건 순전히 ‘기생충’ 덕분이다. 지은이는 영화감독 봉준호(1969년생)의 외조부 박태원(1909∼1986)이고 제목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다.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던 1934년 소설가 박태원의 나이와 같은 스물여섯 살의 구보 씨가 오락가락 비 내리는 경성 시내를 온종일 헤매며 만난 사람들과의 담소화락(談笑和樂)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갑자기 이 단어(담소화락)가 되살아난 건 ‘미스터 트롯’(TV조선)에서 정동원(2007년생·왼쪽 사진)과 이찬원(1996년생·오른쪽) 등이 ‘희망가’를 구성지게 불러준 공이 크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니/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원곡은 183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부르던 찬송가(The Lord into His Garden Comes)인데 1930년대 가수 채규엽이 리메이크했다. 이 노래가 대한민국 최초의 대중가요 히트곡이라고 적은 기록도 있다. 이번에 제레미아 인갈스라는 낯선 이름도 등장했는데 그는 흑인 영가를 채보해 악보집을 만든 사람이다. 거기 실린 노래가 1890년대에 일본에서 번안됐고, 다시 한국에 전해져 1910년대 예배당에서 부르던 걸 채규엽이 취입했다. 그 곡이 바로 ‘희망가’다. 이처럼 오래된 노래가 2020년 2월 13일 목요일 저녁에 대한민국 시청자의 가슴에 스며들었으니 과연 음악의 힘은 질기고 끈덕지지 아니한가.

글을 쓴다는 건 인생이 쓰기 때문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그리운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학설은 아니지만 노래를 부른다는 건 불러내고 싶은 것이 많아서일 거라 짐작한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루이지애나’에서 목화를 따며 흑인들이 흥얼거린 멜로디를 대한민국의 트로트 경연장에서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사노라면’ 중)인 소년과 청년의 목소리로 다시 듣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  주철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다시 문학과 영화로 돌아가자. 논자들은 미래 예측보다 결과 해석에 능란하다. 나도 그 줄에 끼어 거들자면 봉 감독이 ‘파블로프의 개’가 아니라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한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길든 개와 생각하는 개는 차이가 엄청나다. 먹이에 탐닉한 개와 은혜를 갚는 개는 공감의 진폭이 다르다.

그리고 또 하나.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가설은 참말일까. 마침내 나는 봉준호가 공항에서 귀국(16일)하며 남긴 인사말 중에서 그의 외할아버지가 쓴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조용히 원래 본업인 창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기쁜 마음입니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그날 마지막 만난 벗이 구보 씨와 작별한 시간은 새벽 2시였는데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다짐한다. “내일, 내일부터 나,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창작은 대를 이어 보람찬 일이다. 물론 해치기 위해 창작한다면 그건 곤란하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은 동서고금의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창작한다.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거리가 점점 넓어지며 감동이 좀 더 오래가면 그게 곧 명작이다. ‘기생충’ 공식 기자회견(19일)에서 배우 송강호의 소감이 여운을 남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가장 창의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장의 파트너이자 명작의 주인공다운 발언이었다.

봉준호가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말을 듣다가 엉뚱하게 트로트는 이제 음악 장르가 아니라 인생 장르라는 생각이 퍼뜩 스친다. 노래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트로트인 거다.

소년은 묻는다. “세상만사를 잊으면 과연 희망이 족할까.” 아이야, 잊으면 잃는다. 살아남는, 혹은 부활하는 모든 노래는 가슴으로 기억된 노래들이란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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