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연의 지식카페>서사와 인체의 묘사·재현 거부… 형태와 의미를 혁신하다

■ 서양미술사

조주연의 현대미술 속으로 - ⑥ 이면서 표면, 내부서 외부로

회화 고전주의 탈피와 달리 조각의 현대적 전환 늦어… 로댕 ‘발자크像’부실한 묘사로도 생명력
그림자 따라 수직 줄무늬 형성하는 브랑쿠시의‘공간 속의 새’…외부 변화 맞춰 작품 형상 바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현대 조각의 기원으로 꼽히는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기념상. 1897년 작품이며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은 재현의 거부다. 여기서 ‘재현’은 이 용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외부의 세계를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유사하게 다시 혹은 대신 보여준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의 재현을 이상화시켜 미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이 고전주의다. 따라서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고전주의 미학을 거부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낭만주의에서 처음 시작됐다. 현대 미술의 기원이 낭만주의인 이유다.

낭만주의 미학의 출현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현대 미술의 발상지인 프랑스의 경우에는 19세기 초다. 소설가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스탕달은 1823년 ‘낭만주의에 관하여’를 출판하면서 낭만주의를 시의적인 현대풍의 예술로, 고전주의를 케케묵은 고대풍의 예술로 정의하며 대립시켰다. 그런데 출현 시점부터 낭만주의 미학의 견인차는 회화였다. 외젠 들라크루아, 테오도르 제리코, 조지프 터너, 존 컨스터블 등 고전주의 미학의 규범으로부터 과감하게 이탈하며 현대 회화의 지평을 연 화가들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각의 경우는?

현대 조각의 기원으로 꼽히는 작품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발자크’ 동상이다. 1897년에 완성됐으니, 회화와 비교하자면 근 한 세기나 늦은 셈이다. 이보다 20년쯤 앞서 시작된 작품으로 로댕이 죽을 때까지 작업한 ‘지옥의 문’(1880∼1917)을 꼽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매한가지다. 1880년이면 회화가 인상주의를 이미 지나 후기 인상주의로 접어드는 시점인지라, 조각에서 일어난 현대적 전환은 회화에서보다 무척 늦었음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이다. 사실, 현대 미술에서 조각은 회화에 비해 한참 뒤늦고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 회화가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고전주의로부터 이탈하는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하는 초기 모더니즘을 발전시키며 가열한 행군을 이어왔다면, 같은 시기에 조각은 고전주의 미학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투적인 기념물 작업이나 되풀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로댕이 물꼬를 트자, 현대 조각의 전개는 급물살을 탔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이, 또 그다음에는 모더니즘으로의 이행이 급속도로 일어난 것이다. 회화가 근 한 세기를 들여 이룩한 이행을 조각은 한 세대 안에 이룩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로댕과 콩스탕탱 브랑쿠시(1876∼1957)가 일궈낸 성취다.

긴 생애에 걸친 로댕의 작품 세계에는 전통적인 고전주의 조각과 현대적인 낭만주의 조각이 둘 다 존재한다. 전자는 주로 대리석을 쓴 공공 조각에서, 후자는 주로 석고를 쓴 개인 조각에서 우세했는데, 로댕이 생애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운 작품 ‘지옥의 문’은 전통과 현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서 일어난 조각의 이행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지옥의 문’은 당시 신축 예정이던 파리 장식미술박물관 입구의 기념문을 장식할 조각으로 의뢰됐다. 맨 처음 이 작품을 구상한 1880년에 로댕은 고전주의 전통에 충실한 방식으로 작업했다. 묘사하는 서사가 있다(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한 장면)는 점,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유산을 형식적 모델로 삼았다(기베르티의 작품인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1452))는 점에서 그랬다. 따라서 초기의 스케치들을 보면 로댕은 문의 정면을 10개의 패널로 나누고 각 패널에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한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처럼, 문의 정면을 여러 개의 사각형 패널들로 나누고 ‘신곡’의 이야기를 배열한 서사적 부조를 만들 계획이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콩스탕탱 브랑쿠시, ‘프로메테우스’, 1911, 위부터 대리석, 청동.

그러나 이 같은 고전주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듬해 만들어진 세 번째 건축 모델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단테의 서사를 재현하던 패널들이 사라지고 십자가 형태가 문의 중앙 상부에 대신 들어섰으며 그 주변으로 ‘생각하는 사람’ ‘키스’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같은 여러 형상이 배열된 것이다. 이런 중앙집중식 구조는 패널의 병렬식 구조와 달리 서사의 전개를 방해했다. 더욱이 이 모델에서는 단테의 서사와 딱히 관련이 없는 형상들도 등장했다.

결국 최종작에서 ‘지옥의 문’은 지옥에 대한 단테의 이야기와 거의 관계가 없어진다. 우선, 이 문에 등장하는 180개의 형상 가운데 ‘신곡’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두 인물군, 즉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및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뿐이다. 그런데 두 인물군마저도 서사와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로댕이 반복의 전략을 썼기 때문인데, 우골리노의 죽어가는 아들 형상과 파올로의 형상을 쌍둥이처럼 똑같이 만들어놓은 바람에 누가 서사의 어느 장면에 나오는지조차 헷갈리게 만든 것이다. ‘신곡’과 무관한 나머지 대다수의 인물상이 ‘지옥의 문’과 단테의 서사를 분리시킴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서사의 재현을 혼란시키는 반복은 인체의 재현에서도 고전주의에서 벗어나는 유력한 방편이었다. ‘지옥의 문’ 맨 꼭대기에 있는 ‘세 망령’을 보면 동일한 인체를 세 번 반복한 인물상들이 방사형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는 동일한 인체를 상이한 세 시점, 즉 전면-후면-측면에서 묘사한 조합을 통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인체의 이면까지 다 보여주면서 하나의 인체가 지닌 개념적 의미를 완전하게 제공하고자 하는 고전주의 조각의 위반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콩스탕탱 브랑쿠시, ‘공간 속의 새’, 1923, 청동.

더욱이 ‘세 망령’에서 반복되는 신체들은 이상적인 신체가 아니라 일그러진 신체다. 인물의 목은 어깨와 수평을 이룰 정도로 늘어나 있고 어깨는 긴장에 차 부풀어 있으며, 두 다리가 취한 콘트라포스토 역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틀려 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자세인데, 이런 자세는 ‘세 망령’에서 인체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다. 똑같은 자세가 단순히 세 번 반복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망령’이 제시하는 고통에 찬 신체라는 의미는 조각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 외부의 몸짓, 즉 마치 거대한 무게에 짓눌린 듯 심하게 왜곡된 형태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로댕은 조각의 의미를 표면에 발생시키면서, 조각 이면의 서사나 내부의 해부학적 구조에 의존하는 고전주의 조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인데, 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발자크’ 상이다. 이 작품에서 발자크의 신체는 아예 해부학적 묘사가 없다시피 하다. 두꺼운 외투 혹은 가운이 어깨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며 신체를 감싸고 있는데, 앞섶을 여민 두 팔과 손도 그저 불룩하게 솟은 뭉툭한 모습일 뿐이다.

따라서 ‘발자크’ 상은 신체의 내부 구조를 묘사하지 않고도 너끈히 신체를 만들어내며, 마치 두꺼운 기둥처럼 부실하게 묘사됐음에도 이 신체는 천재성이 흘러넘치는 이 위대한 작가의 머리를 떠받들며 추앙하는 역할에 오히려 충실하다. 릴케는 이 기념상을 보고, ‘발자크’의 머리가 “분출하는 물 위에서 춤추는 공처럼 형상의 꼭대기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썼다.

겉보기에 로댕과 브랑쿠시는 달라도 너무 달라 보인다. 로댕의 복잡하고 뒤틀린 인체의 형태와 브랑쿠시의 단순하고 매끈한 기하학적 형태는 상충하는 것 같고, 부드럽고 미묘한 브랑쿠시의 표면은 신랄하고 과도한 로댕의 표면을 거부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단지 양식상의 피상적인 차이일 뿐이다. 브랑쿠시는 직접 “로댕의 발견들이 없었다면, 내 작품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두 조각가를 연결하는 것은 내부의 구조를 관념적으로 전제하지 않는 외부를 조각의 형태와 의미의 근원으로 삼은 전환이다.

겨우 몇 주 동안에 불과했지만 1907년 로댕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경험은 브랑쿠시의 조각이 인체를 묘사하는 고전주의를 벗어나 순수하고 자율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의 출발점인 1907년 작 ‘고통’은 고통에 찬 어린아이의 상체를 재현하면서, 신체의 표면과 이면을 대비시킨 조각이다. 아이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강하게 기울이고 있는데, 이로 인해 아이의 신체는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게 나타난다. 왼쪽에서는 신체의 윤곽선과 형태를 외부에서 다 관찰할 수 있지만, 오른쪽에서는 뺨과 어깨가 맞닿아 있는 바람에 그런 관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이의 오른쪽은 신체의 보이지 않는 내부를 강조한다.

조각의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조각의 형태를 빚어내는 내부 구조의 작용은 바로 다음 해에 나온 ‘잠자는 아이의 머리’(1908)에서 근절된다. 옆으로 놓인 아이의 머리는 이제 몸통과 완전히 분리됐을 뿐만 아니라, 머리의 묘사도 흡사 만들다 말았다고 할 만큼 불분명해 그 어떤 내부도 추론하기 어려운 표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랑쿠시는 표면에 머물지 않고 더 바깥, 즉 조각을 둘러싼 주변으로 나아가 조각의 형태와 의미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는 1911년 대리석으로 먼저 만들고, 그다음 청동으로 만든 ‘프로메테우스’에서 일어났다. 대리석 ‘프로메테우스’는 둥근 머리에 살짝 구부린 목의 단편만 붙여놓은 형상이다. 여기서 머리는 어찌나 매끈하게 다듬어졌는지 거의 완벽한 대리석 구체처럼 보이는데, 이 형상을 머리로 보게 하는 것은 표면 위에 새겨진 이목구비의 어렴풋한 표시뿐이다. 하지만 브랑쿠시가 ‘프로메테우스’를 광을 낸 청동으로 만들자, 조각의 형태와 의미를 결정하는 요인은 표면으로부터도 떠났다. 이 조각을 두상으로 보게 했던 표면의 어렴풋한 이목구비는 ‘프로메테우스’의 번쩍이는 광택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조각의 형태와 의미는 표면 자체가 아니라 표면에 반사된 주변의 요소들에 의해 결정됐고, 이를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맥락에 의한 드로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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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상황이 조각의 형태에 작용하는 맥락은 브랑쿠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공간 속의 새’(1923)에서 더욱 확연하다. ‘프로메테우스’와 비슷한 무렵에 시작된 새 시리즈도 대리석과 청동으로 제작됐는데, 청동으로 만든 ‘공간 속의 새’에서 화염 같은 형상은 조각의 표면에 빛이 떨어지는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빛이 부딪치면 길쭉한 튜브 형태의 수직 윤곽선은 반사된 빛 속에 용해되며, 이로 인해 고정된 형태에 대한 감각은 깨져 버리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작품의 광나는 표면은 주변 공간의 요소들을 그림자로 받아들여 작품의 형태 위에 수직으로 내려가는 줄무늬를 형성한다.

당연히, 이 수직의 줄무늬는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관람자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표면에서 움직이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그림자에 의해 브랑쿠시의 단순한 형태는 변화무쌍해지며, 이런 결과는 내부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도래한 것이다. 이 점에서, 브랑쿠시의 작업은 내부의 구조에 의존하는 고전주의 조각을 외부의 표면으로 반박한 로댕의 작업을 한 단계 더 혁신한 현대 조각의 성취다. 미술이론가


■ 용어설명

브랑쿠시와 뒤샹 : 겉보기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브랑쿠시와 로댕이 알고 보면 깊은 연관관계가 있듯이, 브랑쿠시는 뒤샹과도 그런 관계였다. 먼저 상반된 측면. 뒤샹은 제품을 선택하는 레디메이드의 개척자고, 브랑쿠시는 작품을 창조하는 조각의 제작자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대부분 가공되지 않은 반면, 브랑쿠시는 작품을 직접 조각했다.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통해 작품 제작을 산업에 맡기고 작품을 작가의 개성으로부터 분리시키며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미학적 질문을 제기했다면, 브랑쿠시는 예술에 헌신하며 혁신하는 자였다. 그러나 브랑쿠시의 작품은 기하학적 형태를 약간만 변형시킨 것이라, 그가 개성적으로 창조해낸 형태라고 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결과적으로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브랑쿠시의 조각은 둘 다 비개성적인데, 이것이 의외의 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