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민의 지식카페>루이 14세, 돈 퍼부어 오페라 부흥…‘왕권 강화’에 교묘히 활용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홀’.

김학민의 오페라 문화사 - ⑥ 프랑스 초기 오페라

■ 예술 미학

베르사유 궁전 만들어 귀족들 무더기 초청, 호화공연 베풀며 왕의 권위 주입하고 길들이기 ‘정치 프로젝트’
이탈리아 작품 들여와 프랑스化·일반 시민들 위한 극장도 만들어… 문화예술 자부심·저력 키워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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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페라는 오페라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자리 잡지 못한 유일한 유럽 국가였다.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매력에 빠지면서도 ‘이탈리아에 뒤질 수 없다’는 경쟁의식과 우리 식의 오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더 컸다. 낭만주의 시절 이탈리아의 슈퍼스타 작곡가 베르디와 독일의 바그너도 파리에서 오페라를 올리기 위해서는 프랑스어로 가사를 새로 붙여야 했고,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발레와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완하는 각색 작업을 해야 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오페라에 광적 열기를 보였던 오페라 초창기에,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태생의 프랑스 재상 마자랭(1602∼1661)이 수입한 로마 작곡가 루이지 로시(1597년경∼1653)의 ‘오르페오’ 공연(1647, 팔레 루아얄)에 대해 당시 프랑스 궁전의 왕가와 귀족들은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온 ‘무대 마술사’ 토렐리의 놀라운 무대장치에는 경탄했지만 정작 카스트라토의 어색한 노래와 과장된 장식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루이 14세(1638년 출생, 1643∼1715 재위)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1638∼1683)의 결혼 축하공연으로 이뤄진 베네치아 작곡가 프란체스코 카발리(1602∼1676)의 ‘세르세’(1660, 루브르 궁전)도 실패에 그쳤고, 원래 계획했던 같은 작곡가의 ‘사랑에 빠진 에콜’(1662)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인들은 오페라보다 발레와 연극을 더 좋아했다. ‘발레 드 쿠르’의 인기와 라신, 코르네유로 대변되는 프랑스 고전비극의 인기에 사로잡힌 프랑스인들에게 오페라는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장르였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크 시절 프랑스 오페라 산실인 팔레 루아얄의 ‘오페라 극장’(1769 드로잉).

◇문화·예술로 귀족 길들이기 = 루이 14세는 프랑스 땅에 오페라가 자라날 수 있도록 막대한 돈과 열정을 퍼부은 프랑스 오페라의 산파였다. 5세의 나이에 프랑스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어머니 안 도트리슈(1601∼1666)의 섭정과 마자랭 재상의 실권에 억눌려 살아야 했던 그에게 유일한 기쁨은 연애와 발레, 연극, 음악이었다. “마자랭 재상의 독려로 승마와 더불어 발레 레슨을 하루도 빼놓지 않은” 왕은 (Guest, The Paris Opera Ballet, 2006, 6∼7) 재상이 소개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현란한 무대에 감탄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감 없이 받아들인 독일, 오스트리아 황제들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국가의 정체성과 신성한 왕의 권위를 고취시켜줄 ‘프랑스적’ 오페라를 주문했다.

마자랭 재상이 죽으면서 1661년, 본격적으로 태양왕의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23세의 루이 14세에게 발레와 음악, 연극은 취미이자 교묘한 통치 수단이었다. 부르주아 출신의 영리하고 충실한 콜베르 재상은 전임자인 마자랭처럼 문화, 예술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예술로 귀족들을 길들이는 법을 주지시켰다. 콜베르의 제안으로 펼쳐진 루이 14세의 문화예술 정책은 규모와 화려함이 유럽 어느 정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것으로, “군사, 외교,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무기”였다(Snowman, the Gilded Stage, 2009, 51∼52).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귀족들을 길들이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6000∼7000명의 동시 숙식과 가공 연회 기능을 갖춘 베르사유 궁전에 루이 14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2세 때 아버지 루이 13세의 사냥터에 지은 작은 성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1651). 이후 마자랭 재상이 죽고 실권을 장악한 그는 넌더리 나는 파리를 떠나 살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한 끝에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로 마음먹고(1661), 아버지가 지은 작은 성의 확장 공사에 들어갔다(1661∼1678). 공식 입주(1682) 이후에도 증축은 루이 14세가 죽기 직전까지 계속됐다(∼1715). 루이 14세가 죽은 후 섭정을 맡은 펠리페 2세의 공백기를 거쳐 대를 이은 루이 15세는 증조할아버지인 루이 14세의 뜻을 충실히 따라 베르사유 궁전의 증축과 개보수를 계속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수백 명의 지방 귀족을 일정 기간 머물게 하면서 호화로운 파티와 공연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줬다. 한편, 아침 기상 때부터 저녁 침소에 들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정례화된 궁중 예법으로 은근히 왕의 권위를 주지시켰다. ‘여왕의 침소’에 초대해 큰절을 하게 하는가 하면, 왕을 위해 마련한 식사 용기 앞에서는 모자를 벗게 했다. 유럽 역사상 어떤 궁전에서도 이처럼 왕의 권위를 위해 정교하게 계산된 예법이 실행된 적은 없었다(Snowman, 49∼50). 프랑스 귀족들은 점차 베르사유 궁전에 초대되기를 학수고대했고, 시간이 더 지나자 원하지 않는다 해도 대놓고 거절할 수 없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펠레티에 홀 (1821년경). 19세기 파리 오페라의 전용극장(1821∼1873).

◇발레와 오페라 공연 = 발레와 오페라, 연극 공연은 루이 14세가 마련한 정례화된 궁중 예법의 하이라이트였다. 프랑스 왕가의 공연은 정식 극장이 아니라 궁전의 정원 혹은 실내에서 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연이 이뤄진 궁전은 파리 시내의 루브르 궁전과 튀일리 궁전, 파리 근교에 위치한 퐁텐블로 궁전, 생제르맹앙레 궁전, 베르사유 궁전 등 다양했다. 파리에서 55㎞ 떨어진 퐁텐블로 궁전에서는 매해 가을철마다 왕의 일가족들이 몇 주를 머무르면서 오페라 관람을 했고, 파리에서 19㎞ 떨어진 생제르맹앙레 궁전에서도 오페라 공연이 거행됐다. 작은 규모의 오페라들은 파리 시내의 루브르 궁전과 연결된 튀일리 궁전에서 이뤄졌다.

베르사유 궁전의 경우 공연은 처음에는 정원(아폴로 분수대의 서쪽 구역, 바쿠스 분수대 구역 등)과 갤러리, 계단, 라운지에 마련된 임시 공연장(중앙 갤러리의 ‘거울의 홀’ ‘왕의 작은 방’에 위치한 ‘캐비닛 극장’ 등)에서 이뤄졌다. 정식 극장이 지어진 것은 왕이 궁전에 공식 입주(1682)한 지 6년이 지난 1688년부터였다. 이 해에 지어진 ‘라 코메디 홀’과 ‘그랑 에쿠리’는 베르사유 궁전의 상설 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규모가 더 크고 대리석 느낌의 나무 목재로 된 값비싼 음향설비를 갖춘 ‘루아얄 오페라’는 루이 14세 때 계획된 후 후계자 루이 15세의 결실이다. 역시 루이 15세 때 프티트리아농이 들어섰으며(1770년 완공, 1200석), 루이 16세 시절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요청으로 퀸스 시어터가 들어섰다. 이후 프랑스 통치자들은 이 궁전의 크고 작은 구역 및 극장에서 다양한 행사, 공연을 주최했다.

◇파리 시민을 위한 오페라하우스 = 팔레 루아얄의 동쪽 날개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1673∼1781)은 프랑스 왕가의 오페라 공연들을 파리 시민들에게 선보인 역사적 공간이었다. 왕족과 방문 귀족에게만 허용되던 베르사유 궁전, 퐁텐블로 궁전, 튀일리 궁전, 생제르맹앙레 궁전의 오페라 공연들과 달리, 루이 14세는 이 극장에 부르봉 왕가의 왕족과 귀족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의 입장을 허용했다.

이 극장에는 1200명 정도의 청중을 들일 수 있었다. 이 중 600명 정도는 ‘파르테르’(땅, 광장)라 부르던 극장 홀 가운데 메인 구역에서 좌석 없이 서서 공연을 관람했는데 하인들의 술주정과 일반 시민의 싸움 등이 일쑤여서 무장한 경호원이 지키고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맨 위층 후미진 곳에 위치한 ‘파라디’(천국)라는 구역은 나무 좌석이라 불편했으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티켓값으로 부모나 하인들의 감시를 피한 청춘 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많았다. 값비싼 박스석들은 당시 유럽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귀족들이 2∼3년 치의 사용료를 미리 지불해 독점했는데, 늦은 점심식사와 만담, 토일렛 휴식 등을 하다 공연이 시작된 후 박스석에 들어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Snowman, 53).

왕이 파리 시민을 위해 팔레 루아얄의 극장 공연을 허용한 것은 국가의 위용과 왕의 자비로움을 널리 홍보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 극장 공연의 전권을 맡긴 작곡가 륄리(1632∼1687)의 오페라는 궁전 공연에 이어 팔레 루아얄에서 대중 공연을 하는 이중 공연 시스템을 갖췄다. 이렇게 해서 ‘아티스’(1676, 생제르맹앙레 ; 팔레 루아얄), ‘이시스’(1677, 생제르맹앙레 ; 팔레 루아얄), ‘파에통’(1683, 베르사유 궁전 ; 팔레 루아얄), ‘롤랑’(1685, 베르사유 궁전 ; 팔레 루아얄)에 이르는 값비싼 륄리표 국왕 홍보물이 궁전 초연의 검증과정을 거친 후 파리 시민들에게 유포됐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렇듯이 왕은 이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파리 오페라단의 뿌리 = 팔레 루아얄의 ‘오페라 극장’은 오늘날 파리 오페라단의 전신인 ‘오페라 왕립 아카데미’(1669∼)로 존재가치가 더욱 빛난다. 긴 이름으로 된 수많은 명칭 대신 “오페라 L’Opera”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단체는 원래 작곡가 로베르 캉베르(1628∼1677)와 작가 피에르 페랭(1628년경∼1677)의 제안으로 루이 14세가 프랑스 오페라의 육성을 위해 만든 오페라단이었다. 이후 페랭이 빚에 몰려 투옥되고 륄리에게 전권이 이양되면서 륄리 오페라의 산실이 됐고, 이후 루이 15세 시절에는 라모(1683∼1764) 오페라의 산실이 됐다.

파리 오페라단이 들어선 극장만 해도 무려 열일곱 개나 된다.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인 캉베르-페랭의 ‘포모네’가 공연된 라 부텔르 홀(1671∼1672)과 륄리, 라모 오페라의 산실이 된 팔레 루아얄 극장(1673∼1781)을 거친 후, 프랑스 혁명기에는 펠레티에 홀(1821∼1873, 파리 라 루아 거리)이 이 단체의 센터가 돼 수많은 그랑 오페라를 낳았다. 이후 새로운 센터가 된 팔레 가르니에(1875∼)는 파리 9구역, ‘오페라 광장’에 세워진 신축 극장으로,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통해 수많은 프랑스 낭만 오페라들을 낳았다. 오늘날 이 단체는 최근 신축된 현대식 건물, 바스티유 오페라하우스(1989∼)에서 주요 시즌 공연들을 하고, 발레 공연이나 규모가 큰 고전 오페라는 팔레 가르니에에서 이뤄진다.

350년에 걸쳐 프랑스 오페라의 생생하고도 치열한 현장이 됐던 극장과 오페라단, 궁전의 오랜 역사는 예술을 정치로 활용한 수많은 문화정책의 교묘함을 은폐하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과 저력을 드러낸다. 기다란 역사의 끈으로 매어놓은 알찬 공연예술의 결실은 이처럼 일관되고 집요한 문화 정신을 먹고 자라난다.

경희대 연극영화학과 교수


■ 용어설명

발레 드 쿠르 : 중세 말기 이후 프랑스 궁전에서 유행한 ‘궁중 발레’

팔레 루아얄 : 파리 시내, 생 오노레 거리에 있는 부르봉가의 궁전

그랑 오페라 : 19세기 초중반 유행한 대형 프랑스 오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