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경제·의료망 붕괴 베네수엘라… 南美 코로나 ‘태풍의 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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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두로 “코로나 만반의 준비” 선언했지만…

당국 “확진자 없다”주장하지만
주변국은 공식 통계 신뢰 못해

대통령·국회의장 모두 2명 등
정치적 혼란 이어지는 가운데
다국적 제약사·의료진 떠나고
마스크 등 기본 도구도 태부족
사실상 전염병 대처 능력 상실

전 세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상대적으로 확진자가 적었던 남미에서 베네수엘라가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두 명의 대통령, 두 명의 국회의장이 나오는 초유의 정국 혼란 속에 사실상 경제마저 붕괴돼 유사시 방역을 위한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확진자는 없다”는 베네수엘라 당국의 주장에 주변국과 관련 단체들은 공식 통계조차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붕괴된 의료 서비스 체계 = 현재 집권 중인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난 2월 28일 코로나19를 ‘인류에 대한 위협’이라고 선언하며 “이를 억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밝혔다. 마두로 대통령은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을 수장으로 하는 대통령 직속위원회를 구성하고 관련 보건의료기관 운영센터와 국가생명안전위원회 등을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카를로스 알바라도 보건장관도 지역 치료 시설의 준비를 돕기 위해 범미보건기구(PAHO)가 진단 키트와 기타 자료를 기증했다고 설명했다.

당국의 공언과 달리 외부의 시선은 차갑다. 우선 베네수엘라의 의료 인프라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월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4년간 다국적 제약회사의 절반이 베네수엘라에서 철수했다. 공공 의료인력의 25%가 민간으로 가거나 아예 베네수엘라를 떠났다. 장갑, 마스크 등 기본적인 도구는 물론 물과 전기 공급도 안정적이지 않다. 지난해 3월 발생한 대정전으로 의료장비의 30% 이상이 망가졌다고 중남미 매체 인포바에는 설명했다.

현지 감염학자 훌리오 카스트로는 EFE통신에 “정부는 진단 팀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며 “인적 자원과 장비, 의약품, 정부 감시 체계 등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마두로 정부의 ‘정보 은폐’ 또한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카스트로는 “마두로 정부는 인플레이션, 범죄와 마찬가지로 공중보건 데이터를 집계·발표하지 않는다”며 “이는 전염병 발생 시 가장 큰 우려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베네수엘라가 전염병 대처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있다. 심각한 경제적 상황에 베네수엘라의 의료서비스까지 퇴행하기 시작했다. 우고 차베스 정권 당시부터 복지·의료 등에 대한 인프라를 대폭 확충했지만 유지할 예산 부족으로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지난해 과학자들은 콜레라나 말라리아 등의 유행을 걱정했지만 코로나19의 확산 속도는 이보다 훨씬 빠르다. 말라리아 환자는 2009년 3만6000명에서 2017년 41만4000명으로 11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2015년 8812명이던 영아 사망 또한 이듬해 1만1466명으로 증가했다. 폐결핵 사망률도 2017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심각한 상하수도 오염으로 수리시설도 부족해 전염병 등에 취약해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심지어 지난해 5월 국가 내 최고 방역기관이자 전염병 관리의 중추였던 베네수엘라 중앙대(UCV) 열대병연구소에 도둑이 들기까지 했다. 당시 도둑들은 컴퓨터와 현미경 같은 값나가는 물건은 물론 박테리아를 체내에서 배양하던 실험용 토끼와 닭, 쥐 등까지 모두 훔쳐갔다. 연구소 내 바이러스과 과장이던 나히르 마르티네스는 당시 마이애미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 동물들을 먹거나 시장에서 팔았다면 누군가가 심각한 병에 걸렸거나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 있을 것”이라며 “(훔쳐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질병통제기관의 보안이 뚫린 상황에서 전국 단위의 전염병 발생 시 통제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무너진 경제·인프라로 바이러스 확산 가능성 더 커 = 베네수엘라의 의료체계 붕괴는 국가 경제가 사실상 마비됐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넘어 세계 제1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던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의 99%를 석유에 의존할 정도로 심각한 산업 편중 현상을 겪고 있다. 국제유가가 높을 경우엔 문제가 없지만 원유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한 2010년부터는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서부텍사스중질유(WTI)가 배럴당 30달러 선까지 위협받는 현재 상황에선 타격이 더 크다. 베네수엘라는 배럴당 생산단가가 27.52달러로 러시아(20달러)나 미국(20.99달러), 사우디아라비아(8.98달러)보다 높아 다른 산유국보다 유가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여기에 지난해 1월부터 미국의 베네수엘라 제재가 시작되면서 ‘설상가상’의 상황이 닥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베네수엘라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35%,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0만%로 추정했다. 전년도 실질 GDP 성장률 -18%, 소비자물가상승률 6만5370%를 아득히 추월한 수준이다. 심지어 올해 베네수엘라의 실질 GDP 성장률도 -10%, 소비자물가상승률은 50만%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는 부족한 예산에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베네수엘라에서 네 번 이상의 ‘대정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2월 발표된 유엔세계식량계획(WFP) 보고서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국민 3명 중 1명꼴인 930만 명이 기초 영양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암담한 현실에 베네수엘라를 떠나 이웃한 콜롬비아나 카리브해 국가로 넘어가려는 이주민도 대거 발생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약 400만 명이 베네수엘라를 떠나 외국으로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주변국들은 이들을 통한 코로나19 유입을 우려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경우 현재 국경을 넘어오는 베네수엘라 주민들을 상대로 발열 체크 등 검역을 강화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 확진자가 나오면 바로 국경을 폐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적 혼란 계속, 방역 구심점도 무너질 전망 = 경제적 붕괴 속에 베네수엘라의 심각한 정치 붕괴는 사회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대통령이 2명이다. 마두로 대통령 외에 야권을 이끌고 있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대통령을 자임하며 ‘2명의 대통령’ 체제가 된 지 1년 2개월을 넘었다. 마두로 대통령 측은 과이도의 국회의장직을 인정하지 않고 친정부 성향의 인사로 앉혀 ‘2명의 국회의장’이 되는 상황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과 브라질 등이 과이도 의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마두로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다.

정통성 확보가 시급한 마두로 대통령 측은 통상적으로 연말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당겨 조기 총선 실시를 언급했는데 공언과 달리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지난 7일 수도 카라카스 외곽에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창고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사건을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마두로 대통령 측의 자작극 가능성도 흘러나온다. 베네수엘라 여론이 양분된 상황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조기 총선에서 승리하리란 전망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일을 벌였다는 의혹이다. 당시 화재로 투표 기계 4만9323개와 지문인식기 5만 개가 불에 타 망가졌다. 무사한 투표 기계는 562대에 그쳐 전국 규모의 전자투표를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베네수엘라 여야는 화재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며 비난전을 벌이고 있다.

박준우 기자 jwrepublic@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