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서사가 흐르는 다리, 시·그림·노래·영화가 되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연인들은 퐁네프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떠나감과 만남의 장소 사랑과 이별의 다리.(김병종, 퐁네프다리, 40×30㎝, 종이에 혼합채색, 2019)

■ (27) 파리 퐁네프다리

밤에 조명 받아 빛나는 강가
술잔 든 예술가들 모이는 곳
제2의 피카소가 탄생할지도

영화속 홈리스와 화가의 사랑
타오르는 감정은 집착·광기로
‘불꽃의 도시’ 파리 만들어내

발길 붙드는 ‘오래된 새 다리’
또 어떤 영감·사연 전해줄까

강이 흐르면 그 위에 다리가 놓인다. 그리고 다리가 놓이면 사연이 생긴다. 강의 이쪽과 저쪽은, 만남과 이별의 사연이 있다. 특히 세월과 함께 오래도록 남은 다리는 더 이상 왕래의 교통수단만이 아니다. 사연을 만들어내는 그것은 동시에 시를, 그림을, 노래를, 영화를 낳는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그림으로 퐁네프(1887년 작, 워싱턴DC, 내셔널갤러리 소장)를 남겼고 누벨바그영화의 기수로 뽑혔던 젊은 감독 레오 카락스는 ‘퐁네프의 연인들’을 만들었다.

퐁네프다리가 나 같은 이방인에게까지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아무래도 르누아르의 그림보다는 영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카락스의 영화는 시각적으로 강렬했다. 그 영화에는 홈리스 곡예사인 알렉스가 나온다. ‘나쁜 피’에서 열연했던 그 불안과 광기의 청년 드니 라방이다. 유랑하는 그에게는 퐁네프가 집이고 이불이다. 밤이면 조명을 받아 번쩍이며 흐르는 다리 아래 물결을 보면서 사는 그는 그곳이 편하다.

어느 날 이 다리에서 만난 여자가 미셸(쥘리에트 비노슈). 그녀는 화가였지만 점차 시력을 잃게 되면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그녀의 마지막 소망은 시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는 일이었다. 렘브란트, 흔히들 ‘빛의 화가’로 알고 있고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빛은 자주 바깥으로부터의 외광(外光)에 의해 밝음과 어둠으로 나뉘는 구조를 뛰어넘는다. 그는 두 개의 거울을 두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곤 했는데 바깥을 보던 그의 눈은 차츰 내면으로 파고든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속 주인공들이 파리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하여 초기의 빛과 어둠을 나누는 구성은 극적인 것이 많고 작가 또한 그러한 극적인 요소를 즐기는 듯싶었지만 후기로 올수록 작가가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그리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 내면의 캄캄한 어둠과 절망, 그리고 그 절망을 비추는 한 줄기 빛, 이것이 렘브란트 회화의 진정한 빛의 미학이었다. 어쩌면 카락스가 이점에 착안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간 알렉스와 미셸. 하지만 그토록 보기 원했던 그림이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알렉스는 촛불을 비춰주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림을 미셸은 안타깝게 손으로 더듬을 뿐이었다.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빛. 그토록 보기 원했던 그 빛의 그림을 보지 못하고, 그녀는 절망 속에서 헤매다 실종된다.

한 번도 제대로 그녀에게 사랑의 고백을 해보지 못한 채 헤어져 버린 알렉스는 퐁네프를 서성이지만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거리에 나붙은 그녀를 찾는다는 포스터를 보게 되고, 사람들에게 그녀가 발견되면 영영 자기 곁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적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리하여 포스터가 붙은 곳마다 찾아다니며 불을 지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마침 프랑스대혁명을 기념해 밤하늘에는 축제의 폭죽과 불꽃들로 수놓아지는데, 알렉스는 곡예사답게 입에 불을 머금어 토해낸다. 짐승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화염, 그리고 귀를 때리는 폭죽 소리 그 위에 축제와 광기, 고요하던 파리는 갑자기 불꽃의 도시가 되고 어두운 밤은 화염과 폭죽으로 뒤범벅이 된다. 어둠 속의 불꽃, 사랑과 죽음의 서사시이다. 그러고 보면 감독에게 퐁네프다리는 하나의 오브제로 던져졌을 뿐, 카락스는 자신만의 불타는 파리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술의 도시답게 화가와 미술관, 렘브란트가 나온다.

센강이 지척인 내 숙소의 앞뒤 골목들에는 자그마한 화랑들로 가득하다. 밤이면 그 작은 화랑들에서 와인 잔을 부딪치며 작가들의 오프닝 파티가 열리는 것이 창 너머로 보인다. 서울의 인사동처럼 한 떼의 왁자지껄한 젊은 예술가가 모여서 그야말로 날마다 축제인 것이다. 대체로 오프닝 파티가 끝나면 가난한 그들은 캔 맥주 하나씩을 들고 근처 퐁네프 쪽으로 나간다.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물가에들 앉아 그렇게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지내는 것이다.

밤의 퐁네프를 거닐며 나는 장차 저 가난한 젊은 화가들 중에 또 다른 피카소와 마티스가 나오겠지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쩌면 이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고요한 도시 파리에는 예술가의 혼이 다시 불꽃처럼 여기저기서 타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영화에서처럼 퐁네프가 그 예술혼의 한 발화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퐁네프, 언제나 새 다리인 가장 오래된 다리, 앞으로 이 다리는 예술가들에게 또 어떤 영감과 사연을 전해주고 무슨 말을 걸어올 것일까.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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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욕망·집착·우연·절망 그려… ‘실존주의’처럼 난해하지만 강렬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파리 센강의 아홉 번째 다리인 퐁네프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가장 새 다리라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퐁네프다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때문인데 그는 마치 실존주의 철학처럼 난해하면서도 강렬한 영화를 만들어 프랑스 영화의 새로운 기수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사랑의 욕망과 집착, 우연과 절망 그리고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영상효과로 연출한 작품이다.

‘당신이 하늘은 하얗다고 한다면 나는 구름은 검다고 말할 테고 그럼 우리 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영화 속의 대사는 한동안 카락스 영화의 마니아층들에게 회자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