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터르 몬드리안,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 1920.
■ 서양미술사
조주연의 현대미술 속으로 - ⑦ 수평과 수직의 순수 추상
몬드리안, 피카소·브라크 분석적 입체주의 그림서 해답얻어… 대상을 ‘수평對 수직’으로 쪼갠 화법 모색
‘+’ ‘-’ 선을 패턴화… 1920년 삼원색·무채색 활용, 불균등한 단위로 완벽한 긴장·균형 이뤄
그림은 재료가 무엇이든 평면에 그려진다. 그런데 이 평면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림이 그려지는 표면(surface)과 그려진 그림이 보여주는 화면(picture plane). 당연한 말이지만, 표면은 주어진 물질이고, 화면은 화가의 구성이다. 그래서 표면은 물질적 평면, 화면은 구성적 평면이라고도 한다.
현대 이전 서양 미술의 역사는 화면이 표면을 철저하게 은폐했던 역사다. 화가는 재현의 임무에 따라 세계를 시각 경험과 유사하게 그려내야 했고, 이를 위해 원근법과 명암법을 썼다. 그리하면 화면에서는 마치 눈으로 내다보는 세계처럼 전경-중경-후경으로 멀어져가는 깊은 공간이 펼쳐지고, 이런 공간의 완성은 그 속에 들어찬 형상들의 입체감으로 마무리된다. 원근법과 명암법이 모두 잘 맞아떨어지면 2차원의 표면에서 3차원의 화면이 보이는 착시가 일어난다. 이를 미술에서는 환영주의(illusionism)라 한다.
19세기 초의 낭만주의부터 20세기 초의 입체주의까지 현대 미술의 역사는 고전주의 미학에 대한 다방면의 공격들로 진행돼 왔지만, 이 공격들의 공통점은 환영주의의 파괴다. 환영주의가 파괴되면 화면에 구성된 3차원 공간의 착시가 깨지면서 표면에 주어진 2차원의 평면이 실상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데 화면이 더 이상 표면을 은폐하지 못하고 표면을 인정하게 되면 화면의 공간은 얕아지고 형상은 납작해진다. 이것이 마네의 ‘올랭피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표면에 대한 인정이 더 급진화되면, 다시 말해 화면이 표면에 굴복하면 형상은 깨지고 공간과 뒤섞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10년경 분석적 입체주의가 도달했던 화면이다. 피터르 몬드리안의 추상 미술은 환영주의를 거의 다 깨뜨린 이 분석적 입체주의의 성과 위에서 피어난 꽃이다.
몬드리안은 1911년 암스테르담의 한 전시회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분석적 입체주의 그림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가 여러 가지 기존의 양식들을 실험하며 자신에게 적합한 현대 회화의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모색하고 있던 때다.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몬드리안은 돌파구를 봤다. 대상의 외양을 파편으로 쪼개 화면 전체에 펼쳐놓은 분석적 입체주의 화법은 전통적인 재현 회화의 화법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현대적인 것이자, 신지학에 심취해 외양의 세계 너머의 근원적 세계를 추구했던 그의 정신적 성향에도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터르 몬드리안, ‘흑백 구성 10번’, 1915.
그러나 입체주의에 정통하겠다는 결심으로 몬드리안이 파리로 간 1912년 초는 이미 입체주의가 콜라주로 방향을 수정한 다음이다. 실망했으나, 몬드리안은 굴하지 않았다. 그는 입체주의자들이 저버린 1910년 시점의 분석적 입체주의로 되돌아갔다. 몬드리안은 회화가 경험적인 가시적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라 믿었고, 이 구조를 드러내는 적합한 방식을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의 작업은 우선 대상과 공간의 경험적 특수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낼 수 있는 구성요소를 모색하는 데 집중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까지 이어진 첫 번째 파리 시기에 몬드리안은 정면 시점을 채택해 모티프를 더 엄밀한 직각 형태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동일한 소재를 취해 1911년과 1912년에 그린 두 연작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1’과 ‘생강단지가 있는 정물 2’는 네덜란드와 파리 사이의 변화를 보여준다. 파리에서 그려진 ‘생강단지 2’는 암스테르담에서 그려진 ‘생강단지 1’과 달리, 대상과 공간의 개별적 특성과 환영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1913년에 이르면 모든 것은 공통분모로 환원된다. 이제 회화의 기능은 이항대립으로 이뤄진 세계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자, 그 대립 항들이 서로를 어떻게 중화시켜 평정 상태를 이루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대상은 대략 수평 대 수직의 관계로 조합된 패턴으로 형상화된다.
1913년 작 ‘구성 2번(선과 색의 구성)’과 1915년 작 ‘흑백 구성 10번(부두와 바다)’ 사이의 차이는 몬드리안이 수직-수평의 대략적 이항대립을 +와 -의 이원체계로 더 간명하게 환원시켰다는 점과 이렇게 환원된 세계의 근본 요소들이 전자에서는 평정 상태를 이루고 있는 데 반해 후자에서는 역동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변화는 가족 방문을 위해 1914년 네덜란드로 갔던 몬드리안이 제1차 세계대전에 발이 묶여 1919년까지 고향에 머무르게 되면서, 그 시기에 접한 헤겔 변증법의 영향과 관계있다. 몬드리안은 대립항들의 긴장과 모순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 체계라는 생각을 헤겔에게서 수용했으며, 이를 통해 “각각의 요소는 그 반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일생의 모토를 결정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터르 몬드리안, ‘선 구성’, 1917.
이 모토에 따라 그의 작업에는 새로운 문제가 설정됐다. 가시적 세계를 기하학적 패턴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계를 지배하는 변증법의 법칙을 캔버스 위에 제정하는 게 새로운 문제가 된 것이다. ‘흑백 구성 10번(부두와 바다)’은 부제가 명시하듯이 위에서 내려다본 부두의 수직 방파제와 바다의 수평 반사면이 만나서 생기는 십자 구조를 +, -의 이원체계로 탐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십자형 자체보다 십자형의 형성과 분해가 동시에 일어나는 역동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화면에서 역동성을 구현하는 작업은 몬드리안의 관심이 세계의 근본 요소에서 회화의 근본 요소로 옮겨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동성이야 아직 회화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역동성의 회화적 구현은 선, 면, 색 같은 회화의 물질적 요소들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회화의 물리적 요소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몬드리안은 회화의 물질성을 탐구하는 미술로 나아갔다. 몬드리안이 택한 환원의 원칙은 최대 긴장의 원칙이었다. 선은 직선에 가까울수록, 면은 평평할수록 더 긴장한다는 것이다. 색채의 환원은 선과 면보다 진행이 늦었다. 색채는 여전히 상징주의에 덮여 있어 모방적 성격을 파악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의 대명사처럼 통하는 삼원색과 무채색으로의 환원은 신조형주의가 처음으로 완성되는 1920년에야 최종적으로 이뤄진다.
신조형주의는 몬드리안이 탐구한 순수 추상의 결론으로서, 순수 추상의 첫 단계는 ‘선 구성’(1917)에서 볼 수 있다. 1915년 작 ‘흑백 구성 10번(부두와 바다)’에서 부두와 바다의 역동성을 묘사했던 선들이 이 그림에서는 오직 회화적 역동성을 구성하는 순수한 선들로 환원됐다. 몬드리안이 다음으로 문제 삼은 것은 형상과 배경 사이의 위계적 대립이라는 고전주의 전통의 관례였다. ‘선 구성’에서는 지시대상이 제거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산 혹은 중첩된 선들은 하나의 둥그런 형상을 중심부에 만들고, 배경은 빈 공간의 위치, 형상의 뒤로 물러나 존재하는 주변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상과 배경의 위계를 제거하되 두 요소가 회화적 긴장 관계를 맺도록 하는 방법은? 이 방법을 찾아 몬드리안은 중첩된 면들을 모두 제거한 후 색면들을 화면 전체로 펼쳐 보기도 하고, 채색된 직사각형들을 일렬로 정렬한 후 그사이의 공간을 다양한 농담의 흰 직사각형으로 분할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형상과 배경 사이의 차이는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진행된 그리드 모듈 실험에서 비로소 제거된다. ‘그리드 구성 9(밝은 색의 체커보드)’가 보여주듯이, 그리드 회화는 캔버스 바탕의 가로세로를 동등한 단위로 분할한 연역적 구조의 구성이다.
동일한 크기의 직사각형 단위로 분할됐으니, 형상과 배경의 구분은 물론 둘 사이의 위계도 캔버스에 들어설 틈이 없음은 당연하다. 문제는 구분과 위계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역동적 긴장도 사라졌다는 점이다. 몬드리안은 색채 배분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지만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그리드는 자동적으로 그런 역동적 긴장을 용인하지 않았다.
1920년 작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은 형상과 배경 사이의 구분도 없고 형상과 배경 사이에 위계도 없으나 그림 안의 모든 회화적 요소가 완벽한 긴장과 균형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구성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리드 연작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균등한 단위가 아니라 불균등한 단위의 등장이다. 그리드 회화의 꽉 막힌 평정 상태를 깨뜨리는 이 서로 다른 크기 및 색채의 선과 면들은 서로 각축하며 긴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각각의 단위들은 저마다 명확하게 구분되고 서로 팽팽한 견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어떤 단위도 이 그림에서 독보적인 주인공, 즉 형상으로 떠오르지 못하며, 심지어 그림의 물리적 핵심, 즉 중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단위조차 그렇게 되지 않는다.
‘노랑, 빨강, 검정, 파랑, 회색의 구성’ 한가운데 있는 정사각형을 보라. 이 정사각형은 구성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으며 면적마저 가장 큰 단위지만, 주변 단위들과의 관계에 의해 실제로는 크게 지각되지도 않고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불균등한 단위들, 이런 단위들 사이의 긴장과 견제, 이를 통해 회화적 역동성은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극대화된다.
몬드리안은 이후 20년 동안(뉴욕의 말년 전까지) 신조형주의 형식을 고수하며 순수한 회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끈덕지게 실험했다. 오직 회화의 요소들만으로 그림을 구성하며,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부정’하게 함으로써 중심을 해체하고, 구성요소들 간의 완벽한 균형을 통해 온전히 자기충족적인 형태를 찾아간 것이다. 분석적 입체주의가 간파한, 그러나 실현하지는 않은 현대 회화의 새로운 논리, 즉 회화의 물리적 조건(조형 요소와 매체의 특성)을 우선순위로 삼되, 이를 바탕으로 순수하고 자율적인 미학적 대상을 구성한다는 논리가 실현됐다. 길이, 면적, 색채의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조형 요소들이 각자의 차이를 온전히 유지한 채 역동적 긴장 관계를 구성하는 이 완벽한 구성 속에는 미술 외부 세계의 흔적이 조금도 없다. 그런 순수한 구성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미술가의 창조적 구상뿐이다. 미술이론가
■ 용어설명
데스테일(De Stijl)과 신조형주의 : 데스테일은 1917년 네덜란드에서 테오 판 두스뷔르흐가 발간한 잡지의 이름이자, 미술가, 시인, 건축가들이 함께한 예술운동의 이름이기도 하다. 유일한 양식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유토피아의 조화와 질서를 새로운 조형적 발상으로 추구했다. 신조형주의는 데스테일의 이상을 구체화하는 원리로, 몬드리안이 ‘데스테일’ 창간호에 실은 ‘회화에서의 신조형주의’에서 제시됐다. 이에 따르면, 데스테일은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무시하고 “오직 원색과 무채색, 오직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오직 수직 또는 수평인 직선”으로 고유한 조형을 찾아야 한다. 데스테일은 1931년까지 지속됐지만, 몬드리안은 1924년 탈퇴했다. 수평선이나 수직선보다 사선이 더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한 판 두스뷔르흐의 요소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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