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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병종의 시화기행 게재 일자 : 2020년 04월 02일(木)
붓으로 마구 휘갈긴 듯, 그만의 세상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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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종, 피카소-불의 전사, 붓의 투우사, 30×40㎝, 종이에 혼합재료, 2019.


■ (28) 프랑스와 피카소

못 그린 듯하지만 시선 끄는 작품들
해석·음미할 수 있는 여지 남겨줘


런던의 한 명품 상가 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호위 무사처럼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까만 양복의 키 큰 흑인이 지켜서고 있는 한 갤러리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실내는 마치 포르쉐 자동차 판매장을 방불하게 화려하다. 늘씬한 미인들과 경호원인 듯싶은 다른 한 사내가 정중하게 맞아준다.

마티스, 브라크, 호안 미로, 칸딘스키…. 미술사의 페이지를 넘기듯 벽에는 화려한 이름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다. 그중에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공책 크기의 크레용 그림 두 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 아래쪽으로는 아무래도 그림의 규모에 비해 너무 크다 싶은 거친 사인이 보인다.

피카소(Picasso). 마치, 나 피카소야, 어쩔래 하고 덤비는 느낌이다. 그림은 대체로 유치찬란했는데 이상하게도 잡아끄는 힘이 있다. 10여 분 만에 해치운 듯, 거친 호흡이 그대로 짙어진다. 세상의 모든 미술관에 내걸린 그림 중에는 압도적으로 약간 못 그린 듯한 그림이 많다는 얘기를, 한 미술사가의 강연회에 갔다가 들은 적이 있다.

동서남북으로 휘저으며 미술관과 갤러리를 쏘다녔던 나로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었다. 대상을 응시하되 자기 나름으로 허물고 비틀어서 약간 엉성하고 못 그린 듯한 그림이 된다는 것인데 그런 그림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미술사가의 말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해석하고 음미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간 상투적이기는 했지만 이 또한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너무 오래 그 함부로 그린 듯한 크레용 그림 앞에 있었던 까닭이었을까. 인공지능(AI) 같은 여인이 서류를 옆에 끼고 와서 느린 영어로 또박또박 설명해준다. 아마 나를 돈 많은 중국인으로, 그리고 아는 이름은 피카소밖에 없는 사내로 짐작했던 듯하다. 가격을 물어보니 잠시 기다리라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가격을 말한다. 어림잡아 우리 돈 8000만 원쯤 되는 액수였다. 그런데 여인이 실수라며 가격을 정정해준다.

▲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머릿속으로 다시 계산해보니 8000이 아닌 8억이었다. 돌아서는 내게 여인은 활짝 웃으며 명함을 건넨다. 금융가치와 예술가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에 들었던 그 미술사가의 강의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과 돈은 행복한 동행을 하고 있군.

마레 지구에 있는 피카소 뮤지엄에는 대부분이 입체파 경향의 작품들로 그가 명성을 얻은 뒤의 것들이지만, 황색시대부터 만년의 춘화와 함께 드로잉과 조각, 도자기 등이 함께 모여 있어서 얼핏 대여섯 명의 합동 전시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끔은 먹으로 휘두른 듯한 드로잉도 보인다. 장 뒤뷔페 같은 일정한 굵기의 검은 선이 아닌 선의 강약과 속도 같이 마치 모필로 그린 유채화 같다. 어쨌든 허다한 작가들이 손보다는 관념을 실타래처럼 풀어내는 시기에 마구 붓으로 그린 체질적인 페인팅들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해질 정도였다.

모처럼 스페인에서 와서 ‘세탁선’이라고 불리는 ‘바토라브와’라는 배 모양의 작가 공동 스튜디오에 방 한 칸을 빌려 짐을 풀었던 피카소.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파리 유명 화랑들을 돌며 주기적으로 피카소 그림이 있냐고 물었다 한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그림과 돈의 동행은 그야말로 평생 행복한 동행을 했던 셈이다.


미술관 아래층 흰 벽에는 손녀딸쯤으로 보이는 여인과 가슴의 부스스한 털을 드러낸 노년의 피카소가 해변에 함께 누워 있거나 수영을 하는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피카소에게는 신화와 전설이 함께 따라다니는데 그중에는 판화, 드로잉, 도자기화, 조각, 펜화 등을 합쳐 그 수가 수십만 점에 이른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들이 있다.

하긴 세계 어느 미술관에 가도 그의 작품이 있고 프랑스에만도 그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이 세 개나 될 정도이니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성싶다. 여인과의 사랑의 일화도 많지만 그것이 스캔들이 되기는커녕 그의 신화를 더 강고히 해주고 있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피카소가 음산한 현대미술사의 한 시기에 구름 뒤에서 번쩍 떠오른 태양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마레지구 미술관엔 ‘황소두상’ 등 피카소 작품만 3000여점

패션의 도시 파리 그 중심에 수많은 의류 브랜드점이 밀집해 있는 곳 마레 지구, 그곳에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바로크식의 3층 큰 건물은 아기자기한 대부분의 매장과는 다른 웅장함이 미술계에서 피카소처럼 크게 느껴진다. 17세기 중반에 지어진 고저택 살레 저택은 1974년부터 10년간 프랑스 현대 건축가 롤랑 시무네가 개조 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지금의 피카소 미술관이 됐다고 한다. 지하와 1층에는 주로 피카소의 작품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임시 전시들과 판화가, 3층은 사무실 등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황소두상(Bull’s Head), 입맞춤 등을 포함해 3000점이 넘는 피카소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피카소가 소장했던 칸딘스키, 드가, 마티스, 세잔 등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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