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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0년 04월 13일(月)
모든 걸 한정하는 죽음… 끝이 있기에 ‘삶의 좌표’ 찾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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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죽음을 향하기에 삶의 모든 좌표가 가능해진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1911년경 작품인 ‘죽음과 삶’. 레오폴드 미술관 소장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⑦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일상의 철학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전진하는 게 삶… 죽을 운명이기에 시간도 열정도 노후도 존재 의미 생겨
죽음은 인간 존재의 바탕에 놓여있어… 가장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본 모습


우리는 이 기분 나쁜 주제를 외면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 죽음은 얌전히 오지 않으며 기분 나쁜 폭력을 데리고 온다. 가령 한평생 균형 잡힌 이상적 인간을 구현해 온 괴테는 어떻게 죽었는가? 프리덴탈이 쓴 괴테의 전기는 이 시인의 마지막을 돌본 의사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 “애처로운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운 불안과 동요 때문에, 이 오랫동안 깔끔한 자세로 움직이는 것에 길들여왔던 고령의 노인도 침대 위에서 쉬지 않고 몸을 뒤치고 또 침대 옆의 안락의자 위로 옮겨가 앉고 하면서, 쉬지 않고 고통을 덜려고 하였지만 헛된 일이었다. 용모는 경련을 일으키고, 얼굴은 잿빛, 두 눈은 둔한 색의 눈구멍에 깊이 떨어져 한없이 흐려져 있었다. 눈매는 이를 데 없이 무서운 죽음의 불안을 나타내고 있었다.”(곽복록 역) ‘파우스트’가 인간의 승리와 구원을 노래할 때 저자 괴테는 죽음의 폭력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 간혹 영웅들은 죽음을 하찮게 보는 듯도 하다. 전쟁에 나가면 단명(短命)한다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트로이 전쟁에 출전했던 아킬레우스는 예언대로 일찍 죽는다. 후에 오디세우스가 저승으로 가서 그를 만난다. 그런데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저승의 유령으로 등장하는 아킬레우스는 딴판이다. 그는 죽음도 마다 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이제 삶을 구걸하는 자이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천병희 역) 죽은 영웅은 품팔이의 삶이라도 좋으니 삶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역겨운 죽음이 검은 짐승처럼 삶에 덤벼들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삶의 중요한 문제란 바로 이 죽음을 이해하는 일, 죽음을 달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길들여 보려는 최초의 중요한 시도는 서로 매우 상반된 플라톤과 에피쿠로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플라톤의 작품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연출한 작품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죽음 이후 영혼은 살아남아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의 영역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러니 죽는 일은 철학이 그토록 애써도 잘하지 못한 일, 즉 진리에 가닿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가 죽으면 도달하는 진리에 욕심이 나서 죽는시늉을 해보는 일이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 여기서 ‘죽는 연습’으로서 철학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죽은 뒤 참다운 이데아의 세계에서 영혼은 계속 살아남으니까 살아생전에도 영혼을 잘 양육하는 일이 중요하다. 살아서 살인과 약탈 같은 악행을 일삼았다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인과 약탈의 죄인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이후 기독교가 의지하는 중요한 사상이 되었다. 죽은 뒤 영혼은 살아생전의 죄과를 계속 지고서 불멸하니까, 살아 있는 동안의 과제란 영혼이 좋아지도록 돌보는 것이라는 사상 말이다.

▲  그리스 아테네 아르테미스 신전 벽화 속 ‘죽음’을 의인화한 신 타나토스.

그렇다면 결국 살아 있는 시간은 죽은 뒤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삶인가? 이는 삶 자체가 존중받기보다는, 삶이 죽은 뒤의 세계에 종속되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삶은 온종일 죽은 뒤에 벌어질 일만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로 주어진 삶보다, 있을지 없을지 모를 죽음 뒤의 영혼에 더 가치를 두는 사상, 삶을 죽음 이후의 노예로 만드는 이런 사상은 후에 니체에 의해 혹독히 비판받는다.

그러나 니체 이전, 고대세계에선 이미 에피쿠로스가 삶을 죽음에 종속시키는 플라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죽음 뒤에 계속 살아가는 영혼 따위는 없다. 육체가 걸음마 하는 유아부터 지팡이를 짚는 노인까지 성장하고 쇠퇴하듯, 영혼 역시 성장했다가 쇠퇴하며 육신과 더불어 사라진다. 따라서 죽음은 영혼이 영원한 세계로 가는 관문이 아니다. 그건 그냥 끝이다. 이런 끝은 공포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할 때 죽음은 우리와 같이 있지 않고, 죽음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 사람도 만날 수 없고 죽은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승리하는 숨바꼭질 놀이 속에 들어선 듯 죽음과 마주칠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멸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고 소멸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에피쿠로스의 이런 지혜가 로마를 지배했다. 니체에 따르면 “로마 시대의 존경할 만한 사람은 전부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경외감을 일으킨다. 흔히 우리는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며, 죽음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자아를 열망한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죽음 이후 영생에 미련을 두지 않으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에피쿠로스의 사상에서 찾았다. 니체는 이 로마인들의 시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멸을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에 이미 진정한 ‘구원’이었다.” 죽음은 산자를 건드리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는 건드릴 필요가 없다. 인생은 두려운 죽음과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이런 철학적 사유를 버팀목 삼아 로마인들은 불멸에의 욕구 때문에 내세를 상상하는 일 없이, 유한한 인생 속에서 평온을 찾았다. 이것은 철학이, 내세에 대한 갈망이라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 때문에 종교 속으로 움츠러들곤 하는 인간을 해방시킨 위대한 경우가 아닌가!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없고, 죽음이 있으면 더 이상 죽음이 공격할 삶이 없다고 죽음에 대해 논리적으로 인식하는 일은 죽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아무리 삶과 죽음은 마주칠 일이 없으며 죽음은 삶을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고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또 수긍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은 논리와 이성적 깨달음이 간신히 만든 수비벽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며 침입한다.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데 그치지 못하고 실제 죽어야 할 운명인 까닭이다.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서구 종교가 그랬듯 지금의 삶을 죽음 이후 내세의 그림자로, 내세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강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에피쿠로스처럼 우리가 죽음과 마주칠 일이 전혀 없는 듯 마음을 다스릴 수도 없다. 삶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전진한다. 작가 보르헤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을 제외하고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사의 존재들이다.”(황병하 역) 반면 늘 죽음을 염두에 둔 인간은 유한하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죽음은 삶 너머의 내세로 인도하지 않고 삶과 무관한 것도 아니며, 삶 자체에 속한 것이다. 우리는 늘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보고 나서 삶을 결정한다는 것, 그것이 ‘죽음을 향한 존재’의 의미이다. 삶의 ‘경계’로서 죽음을 염두에 둠으로써 우리는 삶의 좌표를 찾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죽지 않는 자라고 생각해 보라. 죽지 않으므로 시간을 다투어 급하게 해야 할 일도 없다. 청춘의 시간을 아껴 쓸 필요도 없다. 왜 아끼겠는가? 죽지 않는 인간에겐 시간이 무한한데.

그러나 이렇게 죽음이 없어짐으로써 끝없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사실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종말이 없으니 노년을 준비할 필요도 없고, 시간이 많으니 제때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모든 계획은 불가능해진다. 죽음이 삶을 한정시켜주어야만 삶 안에는 급히 지나가는 청춘도 생기고, 시간을 낭비한 후회도 자리 잡으며, 말년에 대한 예비도 가능해진다. 요컨대 우리가 죽음을 향하기에 삶의 모든 좌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단지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만드는 폭력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능성의 원천일 것이다.

우리 의식의 저 밑바닥에도 죽음이 있다. 어쩌면 죽음은 삶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우리 ‘무의식’ 깊은 곳의 ‘충동’이라고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타나토스)’이라는 개념 아래 이 문제를 숙고했다. 생명이란 물질에 들어온 일종의 긴장 상태인데, 근본적으로 생명은 긴장이 사라진 근원적인 물질의 상태로 회귀하려 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즉 죽음을 향한 충동이 생명의 바닥에는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다. 무생물체였던 것 속에 생겨난 긴장은 긴장 그 자체를 없애 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첫 번째 본능, 즉 무생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생기게 된 것이다.”(박찬부 역) 생명의 뿌리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의 삶은 겉으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지만, 그 쾌락은 근본적으로는 긴장이 모두 사라진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행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인 성행위가 고도로 강화된 흥분의 순간적 소멸과 연관돼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한 바 있다.” 결국 “무생물계의 정지 상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선택한 수단이 쾌락의 흥분이다. 고조된 긴장 상태로 올라가야만, 긴장이 소멸한 죽음의 상태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죽음은 존재 저편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라, 존재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실은 우리의 본모습이었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타나토스 (Thanatos) : 죽음의 충동. 프로이트는 삶의 본능을 에로스(Eros)로, 공격적 본능들로 이뤄지는 죽음의 본능을 타나토스라고 했다. 삶의 본능은 생명을 유지·발전시키고,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며, 종족의 번창을 가져오는 반면, 파괴의 본능으로 불리는 죽음의 본능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다. 인간 스스로 사멸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과 타인을 파괴하고 서로 싸우며 공격한다. 죽음의 본능 대신 공격적 본능(aggressive instinct)이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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