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우 교수의 맛의 말, 말의 맛>1924년 선술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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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온몸이 젖었다면 막걸리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법하다. 1924년을 살던 인력거꾼 김 첨지도 그랬다. 운수가 좋은 덕에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돈을 번 날 혼자라도 마실 판인데 친구의 ‘막걸리 한 잔 빨리게’라는 말이 반가워 선술집을 찾는다. ‘추호탕, 너부안, 굴, 저육, 간, 콩팟, 북어, 빈대떡, 두부, 미꼬리국….’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등장하는 선술집의 메뉴는 이렇다.

‘추호탕’과 ‘미꼬리국’은 요즘 말로 ‘추어탕’과 ‘미꾸라지국’이다. ‘미꼬리’야 모음 하나 차이인데 ‘추호탕’은 그 연원을 알 수 없으니 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너부안’은 얇게 저민 쇠고기를 양념장에 재운 뒤 석쇠에 구운 음식인 ‘너비아니’를 가리킨다. ‘저육’은 오늘날 ‘제육’이라 하는 돼지고기이고, ‘콩팟’은 ‘콩팥’의 당시 표기니 금세 가늠이 된다. 나머지는 지금과 표기가 같으니 상차림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선술집의 메뉴치고는 너무 과하다. 가짓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육해공을 아우르는 재료의 폭이 너무 넓다. 채소와 해물, 그리고 가축의 내장까지 죄다 등장하니 냉장시설이 딱히 없었던 당시를 떠올리면 재료의 선도가 의심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서서 먹는 ‘선술집’에서 짧은 시간에 먹기에는 벅차 보이기도 한다.

지금으로썬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 메뉴가 어느 한 집의 실제 메뉴라기보다는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막걸리 안주의 전부인 듯이 보인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설렁탕’은 이런 의심을 가중시킨다. 조그마한 선술집에서 설렁탕을 끓여 팔았을까? 김 첨지는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어디에 담아서 갔을까? 깍두기는 따로 포장을 해서 줬을까? 이런 잉여의 질문은 소설 읽는 맛을 떨어뜨리지만, 소원이던 설렁탕 한 술도 뜨지 못하고 세상을 뜬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의문이 남는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