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40년 미국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린 블랙스톤 자동 세탁기 광고. 산업혁명의 효과로 가전제품이 갈수록 늘어났지만,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지는 못했다. 뿌리와 이파리 제공
세탁기의 배신 / 김덕호 지음 ／ 뿌리와 이파리
1주일에 1회 하던 세탁·청소
가전제품 등장후 매일 하게 돼
주부들 가사노동시간은 그대로
외려 무보수노동으로 평가절하
68혁명후 페미니즘 운동으로
男 참여 늘며 줄어든 것일뿐
전기밥솥, 가스레인지, 냉장고, 청소기, 세탁기, 식기세척기, 커피머신…. 일어나 잠들 때까지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가전제품들 목록이다. 집 안에서 요리하고 바느질하고 청소하는 데 필요한 이 제품들은 의식주와 관련된 기술들, 즉 가사기술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집 안 곳곳은 가전제품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 특히 가정주부들은 이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상의 삶을 조직한다.
가사노동의 기계화는 1920년대 미국에서 시작해 1950년대 이후에는 유럽으로, 20세기 후반에는 전 세계로 확산되는 중이다. 흔히 가전제품은 “편안함과 편리함”을 제공함으로써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탁기의 배신’에서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1980년대 이후에 축적된 페미니즘 기술사학의 연구 성과를 빌려서 이러한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세탁기, 청소기 등 가사기술이 가정에 도입됐는데 왜 여성의 노동시간이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더 늘어났는가?”
산업혁명은 18세기에 시작되지만, 그 효과가 집 안에까지 밀려든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이 시기에 남녀가 함께 일하면서 자급자족하는 모델이 붕괴하고, 남성은 바깥에 나가 직장에서 일하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역할 분리가 출현했다. 산업화는 성 차별적이었다. “남성과 아이들 일은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여성의 일은 전혀 줄여주지 않는 방향”으로 진전됐다.
청소, 빨래, 다림질, 요리, 설거지, 장보기, 육아, 양육 등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은 오히려 한없이 늘어났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온 가족이 힘을 합쳐 행해야 하는 어엿한 필수 노동에서 화폐를 통해 언제든지 구입 가능한 하찮은 노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완전히 평가절하당해 ‘무보수 노동’ 또는 ‘그림자 노동’이 됐으며, 심지어 국민총생산 등 각종 경제지표에 포함되지 못하는 노동, 즉 무노동이 됐다.
자본주의적 역할 분리를 정당화하는 ‘가정성’이라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유포된다. 가사노동을 “가족에 대한 주부의 애정 표현”으로, 가정을 “직장이라는 소외되고 스트레스 가득 찬 질서로부터 피난처”로, 즉 “주부가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숭고한 의무”를 수행하고, 즐겁고 편안하고 성적 만족까지 기꺼이 제공하는 장소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에 호응해 여성이 ‘살림살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면서, 가정(경제)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했다. “집안일이라는 것이 단순히 반복되는 허드렛일”이 아니라 과학에 바탕을 두고 “효율적 관리”가 필요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말은 유토피아라도 현실은 시궁창이다. 아니, 현실이 너무나 비참하기에 말이 더욱 달콤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쏟아지는 가사노동에 부업까지 겸해야 하는 노동계급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중산층 여성한테도 집을 건사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일은 “힘들고도 단조롭게 반복되고 일이 끝나도 눈에 띄지 않는” 일로, 전혀 ‘체통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때 농촌이나 이민자 출신 미혼 여성들을 가내하인으로 두어 이 문제를 해결한 적도 있었으나, 이 자존감 낮은 일자리의 지원자는 얼마 안 돼 고갈됐다. 바야흐로 가전제품이 등장할 때가 된 것이다.
“전기를 당신의 하인으로 만들라.” 1911년 제너럴일렉트릭의 광고다. 가내하인을 전기하인으로 대체하라는 것이다. 청소기, 다리미, 세탁기, 냉장고, 선풍기, 토스터 등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전기를 사용해야 좋은 어머니로, 즉 가정주부로 성공할 수 있다”는 광고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여성들을 접시, 목욕통, 부엌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실현되는 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가전제품은 불행히도 가사노동에서 여성을 해방하지 못했다. 역으로, 여성을 가사노동에 더 많이 예속되게 만들었다. 온도와 시간만 맞추어 놓으면 세탁기는 빠르고 편리하게 세탁 일을 수행한다. 세탁시간을 줄이고, 육체적 고통을 없애 준다. 그런데 세탁기 사용과 함께 세탁 횟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주 1회 하던 세탁을 시도 때도 없이 하면서 전체 세탁시간이 도리어 증가했다. 구겨진 남편의 와이셔츠, 흙먼지 묻은 아이들 옷을 ‘주부의 수치’로 여기는 담론이 유포되면서 ‘청결 강박’이 생겨난다. 세탁기가 주부들을 더욱 세탁에 붙잡아 두는 역설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청소기 탓에 일주일에 한두 번 하던 집 안 청소를 자주 하는 게 당연시된다. 가전제품이 늘어나면서 요리도 더 자주 하고, 목욕도 더 자주 하게 된 것이다.
1968년 기준, 전체 미국 가정의 89.1%가 진공청소기를, 99.8%가 냉장고를, 90.8%가 세탁기를 소유했다. 이러한 가전제품이 가사노동의 강도를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삶의 질에 대한 기대수준을 한없이 높임으로써 거꾸로 여성을 가사노동에 더 묶어두게 했다. 말 그대로,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 된 것이다. 함정이 있다. 세탁기가 빨래를 한다면 세탁이 주부의 일일 필요는 없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스스로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지만 가전제품은 이런 해방을 만들지 못했다.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든 것은 1960년대 말부터다. 더 획기적인 가전제품이라도 나온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남성 가사노동 시간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남성들이 가전제품의 편리함과 효용성을 알고 개과천선한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68혁명 이후, 미국 사회 전반에 불어닥친 페미니즘 운동 덕분이다. 여성의 가사노동을 조금이나마 줄여준 것은 기술이 아니라 운동이었다. 세탁기는 여성을 배신했지만, 운동은 여성을 해방했다. 376쪽, 1만8000원.
장은수·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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