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클래식>붉은 노을·푸른 바다 무대 삼아… 섬마을 위로했던 ‘거장의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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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건우의 섬마을 음악회

통영 사량도 직접 찾아 연주
음악 외적 요인은 고려안해
어르신·어린이에 감동 선물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클래식 장르를 골고루 들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음악 애호가라고 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 나의 경우는 피아노 음악이 늘 어려웠다. 가만히 집중해서 선율을 따라가려 해보지만 항상 잡생각이 찾아와 도중에 길을 잃기 일쑤였고 예상 밖의 화성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의미를 헤아리다 또 주저앉곤 했다.

그러던 내가 피아노 음악에 다가가게 된 계기가 있다. 몇 해 전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시선을 빼앗긴 일이 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하고 있었다. 초저녁의 파란 하늘에 석양이 지고 있었고 피아니스트는 바닷바람을 개의치 않으며 두 눈을 감은 채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새소리며 저 멀리 아득히 지나가는 고기잡이배까지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진 장면이었다. 몸빼바지와 작업복 차림의 어르신들, 숨죽인 채 감상에 빠져 있는 코흘리개 어린이들까지 배경과 음악이 완벽하게 어우러진 풍경. 통영의 외딴 섬마을인 사량도 앞바다의 무대, 백건우는 번듯한 공연장 하나 있을 리 없는 섬마을에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고자 직접 찾아갔고 사운드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야외의 가설무대에서 테크닉 이상의 예술혼으로 한려수도의 바다를 짙게 물들였다. 마을 어르신들과 아이들도 모두 그의 연주에 흠뻑 젖어 있었다. 5분 남짓한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나의 시간은 석양이 지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흘렀고 전체의 음악이 마치 한순간처럼 내 가슴속에 들어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안우성 클래식 월담 대표

백건우는 세계 정상급의 피아니스트다.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공연하고 유수의 클래식 레이블과 리코딩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작은 공연장을 찾아 작은 연주회를 여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필자의 독일 유학 시절에도 피아노 전공 학생들이 근처 시골 마을의 교회에 백건우의 연주가 있다며 관람을 다니곤 했었다. 그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음악회라고 해도 유치하고 쉬운 레퍼토리를 연주하지 않는다. 단지 아이들과 가까이서 호흡하고 싶다며 최대한 아이들의 코앞까지 가깝게 피아노를 배치하는 것이 전부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남겼다. 연주자의 소박한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기에 적어본다.

“저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하고만 연주하겠다, 어떤 수준이 안 되면 안 하겠다, 이런 생각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누구든지 같이하고 싶어 하면 하고, 누구든지 듣고 싶어 하면 어디든지 가고, 이런 게 음악인의 태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즐거울 뿐이에요.”

안우성 클래식 월담 대표


■ 오늘의 추천곡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섬마을 음악회에서 백건우가 연주한 비창 소나타는 월광 소나타, 열정 소나타와 함께 베토벤의 3대 소나타로 불리는 작품이다. 베토벤은 일생에 걸쳐 총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는데 그 중 비창 소나타는 1798년에 작곡된 베토벤 초기의 작품에 속하며 그의 첫 번째 피아노 대작이라 할 수 있다. 비창 소나타는 다소 난해한 베토벤의 후기 작품에 비해 서정과 우수가 가득하다. 특히 2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Adagio cantabile·천천히 노래하듯이)는 월광 소나타의 1악장과 더불어 베토벤의 소나타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선율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