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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식카페 게재 일자 : 2020년 05월 27일(水)
양심에 찔리면 ‘부끄럽고’… 체면이 깎이면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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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로 읽는 세상

김태환의 이야기철학 - ② 꼬리 잘린 여우

부끄러움 :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내면의 반성적 의식… 타인에게 노출됐을 땐 더 많은 부끄러움 느껴
창피함 : 꼬리 잘린 여우처럼 실존적 고민 없는 부끄러움… 결함 숨기거나 타인의 결함 폭로해 모면하려 해


덫에 걸려 꼬리가 잘린 여우가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여우들에게도 꼬리를 자르도록 권한다. 여우는 동료들을 불러 모아놓고 꼬리는 보기 흉하며 필요 없이 무겁기만 하니 모두 꼬리를 자르자고 호소한다. 이때 듣고 있던 한 여우가 대꾸한다. “자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렇게 권할 리가 없지.”

꼬리는 무엇에 소용이 있는가?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꼬리가 있다. 기능도 그만큼 다양하다. 몸의 균형추로서의 역할(먹이를 추격하는 표범), 이동 시 방향 조절을 위한 키 역할(새 꼬리, 물고기 꼬리), 보조 팔(원숭이), 감정 표현(개), 도주(도마뱀), 보온(여우), 파리 쫓기(소) 등등. 이 모든 다양한 꼬리의 기능을 종합해 한마디로 꼬리란 무엇을 위한 기관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꼬리는 불명확한 기관이다. 이 점에서 눈, 코, 귀, 다리처럼 삶의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과 다르다. 눈, 코, 귀, 다리와 달리 꼬리는 기능에 따른 규정이 아니다. 그저 몸의 끝에 붙어 있는 신체 기관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뿐이다. 꼬리의 다양한 기능을 보면, 동물들이 ‘기왕 달려 있는 것이니 어떻게라도 써먹으면 좋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저마다 꼬리의 용도를 개발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꼬리가 잉여적인 까닭에 이솝우화 속의 여우도 덫에 걸려 꼬리가 잘렸지만 어떤 심각한 생명의 위기에 빠지지도 않고, 사는 데 큰 불편도 없다. 여우는 다만 모두에게 달린 꼬리가 자기한테만 없다는 사실이 창피할 따름이다.

하지만 창피함도 사소한 문제는 아니다. 여우는 심지어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생각한다. 꼬리가 여우에게 특별히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꼬리 없는 것이 왜 그렇게 창피하며, 창피함이 무엇이기에 못 살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는 것인가?

창피함은 일종의 부끄러움이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의 감정은 자신이 어떤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존재가 될 자질과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비로서 부끄럽구나”라고 말한다면, 이는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해줘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반성적 의식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움이란 무엇보다도 타인의 시선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이고 강력한 부끄러움의 감정은 나의 부족함이 타인에게 노출될 때 발생한다. 그런데 나의 부족함이 타인에게 드러날 수 있으려면 타인 역시 그런 판단의 전제로서 나에 대해 일정한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타인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은 부끄러움의 중요한 요소다. 부끄러운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자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끄러운 것이다. 물론 자식의 기대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면, 아버지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에서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정확히 하자면, 부끄러움의 감정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그 시선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데서 생겨난다. 때로는 거꾸로 자신의 자아상을 타인의 시선에 투영할 수도 있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떤 존재여야 한다는 당위적 자아상을 설정했기 때문에 타인도 그런 기준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한 불만족은 부끄러움을 촉발할 수 있다.

부끄러움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우선은 남 앞에 자신의 결함이 노출됐을 때 느끼는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운 감정이 부끄러움이지만, 그렇게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결함이 드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결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것까지 부끄러움에 포함된다. 여기에서 창피함과 부끄러움 사이의 한 가지 차이가 확인된다. 창피하다는 것은 자아의 결함이 타인에게 드러났을 때, 그래서 타인의 경멸적 시선을 느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감정이다. 누구에게도 노출된 적이 없는 결함에 대해 창피해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창피함은 부끄러움의 표층부를 이룬다.

부끄러움이 창피함보다 더 내적인 감정의 층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라면,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부끄러움은 죄책감과 연결될 수 있다. “이 아비가 부끄럽구나”라는 말에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자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결함으로 자식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이 아버지가 느끼는 책임감의 원인이다. 이런 자책의 감정이 심화되면 죄책감, 죄의식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죄책감은 부끄러움과 긴밀한 관계에 있지만 그 자체가 부끄러움은 아니며, 부끄러움보다 더 내밀한 감정이다. 부끄러움은 아직 결함이 노출되기 전보다 결함이 노출돼 타인의 경멸적 시선을 받을 때 더 강화되지만, 죄책감은 타인이 나의 죄를 아예 모르거나 내게 아무런 외적 징벌이 내려지지 않을 때 활성화된다.

그런데 모든 부끄러움에 죄책감이 동반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결함으로 죄책감을 느낄 일이 없더라도 부끄러워할 수 있다. 그런 부끄러움이 바로 창피함이다. “못난 아비가 몹시 부끄럽구나”라는 자책의 말에서 ‘부끄럽다’를 ‘창피하다’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난한 집안의 소년이 어머니의 학교 방문을 꺼릴 때 그 어머니가 “너는 네 엄마가 창피하니?”라고 묻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것은 소년이 어머니의 초라한 행색을 자신의 결함으로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를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피함은 스스로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나 괴로움이 실려 있지 않은 피상적인 부끄러움이다. 양심이 없는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범죄자로서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에 대해서는 창피해할 수 있다.

인간의 결함 가운데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있지만,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결함도 있다. 결함의 이러한 특성 역시 부끄러움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내가 자신의 결함으로 스스로 고통받는 정도가 심각하다면, 그로 인해 부끄러워하고 있을 여력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결함을 남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해야만 삶의 위험이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는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타인에게 자신의 문제를 드러낼 것이다. 게다가 내가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을 때는 타인의 시선도 달라진다. 오만한 부자도 끔찍한 참상에 이른 가난 앞에서 경멸적 시선을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심지어 연민의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런 타인의 태도 변화 역시 부끄러움을 경감하는 요인이 된다. 물론 타인에게 연민의 시선을 받는 것조차 부끄럽게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내밀한 성격의 부끄러움이다. 적어도 극도로 비참한 사람은 창피함 같이 피상적인 감정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심각한 곤경에 빠질 때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것은 부끄러움의 표피적인 층에 있는 창피함의 감정이다.

그래서 전형적인 창피함의 감정을 일으키는 자아의 결함은 죄책감을 일으킬 정도로 타인에게 해가 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을 비극적인 지경으로 몰아넣지도 않는 비교적 경미한 결함이다. 경미하지만 그래도 결함은 결함이라서 타인의 눈에 띄면 차별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경문왕의 당나귀 귀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결함이다. 당나귀 귀의 문제는 단지 우스꽝스러워 보인다는 것뿐이고, 잘만 감추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여우 꼬리의 결여 역시 창피한 결함에 속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꼬리는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존에 필수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신체기관이다. 꼬리가 잘려서 여우가 겪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온전한 여우가 아니라는 좋지 않은 느낌, 다른 여우들의 시선을 받는 데서 오는 창피함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결함 자체가 비교적 경미한 만큼 창피함이 주는 고통은 오히려 커진다. 그래서 여우는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멜은 후천적으로 불구가 된 사람이 불구로 태어난 사람과 달리 자신의 불구 상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덫에 걸려 꼬리가 없어진 여우를 보면, 그것은 적어도 창피함의 감정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인 듯하다.

꼬리를 잘린 여우는 경문왕처럼 창피해하지만 경문왕보다 불리하다. 꼬리의 결여를 감추는 것은 큰 귀를 가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감출 수 없는 결함을 없애기 위해 여우는 다른 여우들에게도 꼬리를 자를 것을 권한다. 여우는 꼬리의 결여가 큰 결함으로 느껴지는 것이 다만 꼬리 달린 여우를 정상적인 여우로 보는 관념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정상적인 여우의 기준 자체를 바꾸기 위해 동료들도 모두 꼬리를 자르게 하려 한다. 물론 그 제안은 거부된다. 누가 자신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꼬리를 포기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여우가 다른 여우에게 꼬리 자르기를 권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꼬리의 결여가 얼마나 경미한 문제인지 증명된다. 만일 다리가 잘렸다면 여우도 다른 여우에게 자기처럼 다리를 잘라보라는 말은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문왕과 꼬리 잘린 여우의 이야기는 창피함을 모면하는 두 가지 전략을 보여준다. 하나는 결함을 잘 숨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까지 결함 있는 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결함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물론 숨기기가 일차적인 전략이므로, 일단 최선을 다해 결함을 숨겨야 한다. 그러다가 숨기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타인에게 흠집을 내는 전략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타인의 결함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희석시키는 것은 창피함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문제 되는 결함이 타인에게든 자신에게든 심각한 피해를 낳는다면, 결함을 평준화해 자신의 결함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다리가 잘렸을 때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자른다고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식의 태도가 일상화돼가는 느낌이다. 부끄러운 일이 드러나도 나만 부끄러운 짓을 했느냐며 큰소리친다. 부끄러움이 내면을 잃고 피상적인 창피함으로 전락하는 중이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 용어설명

게오르그 지멜(1858~1918) :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베를린대에서 역사학, 민족심리학, 철학, 예술사 및 고대 이탈리아어를 공부했으며 칸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자로서는 불운해 아주 오랫동안 사강사와 무급 부교수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914년에야 비로소 슈트라스부르크대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학계에서 주변인이었으나 ‘돈의 철학’(1900), ‘사회분화론’(1890), ‘역사철학의 문제들’(1892), ‘도덕과학 서설’(1892∼93), ‘괴테’(1913), ‘렘브란트’(1916) 등 사회학, 문화철학, 예술철학, 인식론, 윤리학, 형이상학, 미학 등에서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특히 주저인 ‘사회학’ 등 여러 저작으로 형식사회학을 구축했고, 독일사회학회를 창립하는 등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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