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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게재 일자 : 2020년 05월 28일(木)
세상 변화 원한다면… 절망 상태임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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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의 정치학 /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준형 옮김 / 다산북스

지난 2001년 9·11 테러가 있던 날, 미국 뉴어크 공항을 출발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유나이티드항공 93편(UA093)에서도 한 편의 비극이 펼쳐졌다. 테러리스트들이 조종간을 탈취해 워싱턴DC로 기수를 돌리자 이를 알아챈 승객들이 그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비행기는 펜실베이니아주 스토니크리크의 한 광산 부근에 추락해 승무원과 승객, 납치범 등 44명 전원이 사망했다. 블랙박스 녹음 기록으로 드러난 승객들의 용기 있고 처절한 싸움은 몇 년 뒤 영화 ‘플라이트 93’(원제 ‘United 93’)으로 재연됐다.

행동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이 신간 ‘용기의 정치학’(원제 ‘The Courage of Hopelessness’)에서 주목하는 것은 무엇이 UA093 승객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용기 있는 행동을 낳느냐다. 이 질문에 대한 지젝의 답은 ‘절망’, 다시 말해 ‘희망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타협이나 개선도 불가능한 완전한 절망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인정해야 비로소 실질적인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왜 이 책의 원제가 ‘희망 없음을 인정하는 용기’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젝을 완전한 절망에 빠뜨린 것은 무엇이었나. 책이 쓰인 2017년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상징되는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 유럽에서의 인종주의 및 파시즘 부활 움직임, 미국 등 기존 강국과 중국·러시아 등 신흥 강국 간의 긴장 고조, 테러 세력의 득세 등이 동시다발로 폭발하던 시기다. 이를 목도한 저자는 세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게 온당한지 질문한다. 그러면서 왜 좌파가 ‘거짓 희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지 비판한다. 저자는 “상황이 이렇게 암울한데도 온건한 개혁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며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서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다가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지젝이 제시하는 대안은 ‘공산주의 재창조’다. 공산주의의 재창조만이 해방의 힘을 되돌릴 수 있는 만큼, 모호한 사회적 연대의 개념을 뛰어넘는 급진적인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 피케티가 누진 소유세 및 청년 기본자본 도입, 노동자의 이사회 대거 참여, 세계 차원의 금융등기부 작성을 통한 조세 회피 차단 등 ‘자본주의의 급진적 개조’를 주장한 것에서 한참 더 나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얼마나 큰 공감을 이끌어 낼지는 의문이다. 다만,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은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444쪽, 2만2000원.

오남석 기자 greente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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