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어머니의 ‘그 지혜로운 당당함’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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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반달(1925∼2002)

방과 후 20리 길을 걸어서 동네 초입에 들어서면 그날도 어머니는 괭이, 호미로 개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땅뙈기라도 우리 것이 없으니 남의 야산에다 우리 밭을 만드는 겁니다. 어렵사리 주인 허락을 받았겠죠. 제가 중학교 1∼2학년, 어머니는 30대 후반이지 싶습니다. 어둑어둑할 때까지 파낸 돌을 한 곳에다 모으면서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청한이 너 하고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밥때마다 ‘비린 반찬(생선)’ 한 토막이라도 홀시어머니 밥상에 얹어드리려고, 팔 남매 굶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장사를 다 하였습니다. 쑥개피떡, 밀주(약주) 장사를 거쳐 두부 장사를 오래 하셨죠. 어머니가 만든 손 두부는 인동까지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아버지는 명절 전후 보름 동안은 뻥튀기 장수로 나섰고요. 한창 사춘기인 저는 어쩌다가 뻥튀기 기계를 돌릴 때면 얼마나 창피했는지요. 그걸 알아차린 듯 어머니는 어느 날 홍조 띤 얼굴로 저를 살짝 부르더니 다락에 감춰둔 연초록 티셔츠를 꺼내 주더군요. 새 옷을 입어본 게 얼마 만인지요. 쪽머리였던 어머니의 머리가 수건으로 감싸져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알게 된 9급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돌아보니 생애 가장 기쁜 며칠 간이었습니다. ‘군(郡)에서 유일하게 혼자 합격했으니 보나 마나 최종 합격이지’ 했으나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아버지가 6·25 때 부역해서 그런가?’ 하시며 신원조회에서 걸렸다고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어찌 됐든 군 입대 전까지 계속 ‘불합격’이어서, 진로 문제로 방황한 20세 전후였습니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두 달 만에 치른 공채시험에 최종 합격해 1975년 4월 김해소년원으로 발령 났습니다. 그제야 부모님도, 저도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동안 ‘자식 앞길 막은 부모’라며 얼마나 자책했을까요. 어머니는 저를 볼 때마다 “담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해줘라. 피부병이 심하다니 양잿물로 이부자리 폭폭 삶고,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 공도 자주 차게 해주고….” 제가 어머니께 소년원생들 얘기를 많이 했더니 어머니가 소년원 직원이 다 되셨더군요.

지금 제 나이보다 젊은 아버지를 먼저 보낸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저희와 눈 맞춤도 없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 합동 기일 때면 어머니의 품위 있는 언행이 어록이 돼 늘 화제입니다. 이웃에게 여간해서 아쉬운 소리 못하시고, 주렁주렁 매달린 자식들에겐 강하고 올곧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결혼한 자식과 며느리들을 어려워하면서도 순회 방문하는 게 낙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엿이고 떡이고 유과 등 과자를 바리바리 만들어 오셨죠. 집으로 가실 때면 가져온 물건들을 일일이 값을 매겨 수금하셨고, 그 돈으로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다른 자식들을 도왔습니다. 어머니의 ‘그 지혜로운 당당함’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신설된 보호관찰소로 근무처를 바꾸고 몇 개 기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이거 하나는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신규 직원에게 “처음 출근할 때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 이른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신규직원 임용식’입니다. 동행한 부모님에게 앞으로 자녀들이 ‘보호관찰관’으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 자상하게 설명합니다. 어머니의 손녀와 손녀사위도 제 후배 공무원입니다. 위로받고 싶은 가정사나 기쁜 일이 생길 때면 어머니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옆에 계신 듯한데 계시지 않습니다. 막막합니다.

‘반달’처럼 예쁘다고 이름까지 ‘박반달’로 지었다며 희미하게 웃으시던 어머니. 작년 이맘때 옮겨드린 새 자리는 좀 어떠신지요?

아들 노청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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