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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경일기자의 여행 게재 일자 : 2020년 06월 18일(木)
물·바람·돌 품어…건물, 예술이 되다… 시간·소리·시선 더해져…자연을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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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동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제주 한라산 중산간에 지은 연작 수(水)·풍(風)·석(石)박물관 중 하나인 물 박물관. 예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박물관 자체가 스스로 오브제가 된 건축이다. 사각형에 가둔 물이 둥근 지붕 위의 하늘을 수면에 그대로 비춰낸다. 연작 박물관들은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느낌이 달라진다. 큐레이터는 비 오는 날, 이 박물관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 제주도라 더 경이로운 ‘건축물 투어’

붉게 녹슨 돌 박물관은 ‘시간과 세월’ 상징
빛 방향따라 이동하는 하트모양은 해시계 같아
마구간 닮은 바람박물관, 널 틈 사이로 들려오는 風音이 매력
유리 피라미드 작품 ‘아고라’·‘본태박물관’ 기와 담도 인상적


건축의 가치는 효율과 쓸모만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시각적인 형태의 미감으로만 읽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건축은 자연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건축물에 드리운 빛과 그늘, 그리고 녹슨 시간까지도 제 몸의 일부분으로 담아냅니다. 건물이 유도해내는 바람에도 형태를 부여하고, 빛에도 방향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건축은 의도된 계산으로 사람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건물 안팎으로 이어지는 동선과 그 동선 위에서의 시선까지도 설계하는 것이지요.

하필 자연을 다 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제주까지 가서 건축을 봐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제주의 훌륭한 자연과 거기 조응하는 건축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미감을 넘어선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건축은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자연의 시간과 빛은 건축을 펄떡거리며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어냅니다.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건축이 즐비한 제주에서는 좋은 자연과 거기 걸맞은 좋은 건축을 볼 수 있습니다. 건축의 가치를 형태로만 봐온 시선에서는, 빛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걸음의 속도마저 조절해내는 건축의 경험은 한마디로 ‘경이’입니다. 건축이야말로 제주의 땅과 자연, 그리고 그걸 보는 시선과 해석을 모두 보여줍니다.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주에서 꼭 건축과 만나야 할 이유 말입니다.



# 이타미 준이 제주에 남긴 기념비적 건축

재일동포 건축가 유동룡. 제주 건축의 중심에는 그가 있다. 자연과 조응하는 예술적 건축을 한라산 중산간에 구현한 세계적인 건축가. 한국 이름보다는 이타미 준이란 일본식 이름으로 더 알려졌고 일본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귀화하지 않고 ‘경계인’으로 살았다.

자신의 성(姓)인 ‘유(庾)’가 일본 활자에 없어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택해야 했던 그는, 스스로 무심하게 이름을 지어서 가졌다. ‘이타미’란 그가 한국을 오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던 오사카(大阪)의 공항 이름이고, ‘준’은 절친했던 대중음악 작곡가 길옥윤의 이름 마지막 자 ‘윤(潤)’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름에는 아무런 뜻도, 맥락도, 의지도 없다. 이런 숙고 없는 작명은 아마도 의도적인 것이었으리라. 식민지배의 기억이 채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국주의 국가의 ‘의미 있고 진지한 이름’을 갖는다는 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일부러 무심하게 이름을 지었을 것이었다. 어디 이름뿐이었을까. 식민국가와 피지배 국가 사이의 경계인이었던 그에게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남쪽으로 멀리 산방산과 중문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라산 중산간에는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몰려있다. 핀크스 골프장의 부대 호텔인 포도호텔, 휴양형 거주단지인 비오토피아의 수(水)·풍(風)·석(石)박물관, 구약의 ‘노아의 방주’를 형상화한 방주교회…. 일대는 그의 건축을 모아놓은 전시장과도 같다.

이곳에 이타미가 여러 건축물을 남기게 된 건 재일동포 김홍주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일본 최대의 도시락업체인 혼케가마도야(本家かまどや)의 창업주 김홍주는 제주도에 핀크스 골프장을 짓고 호텔 설계자를 물색하다 당시 일본 건축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타미를 알게 됐다. 이타미와 김홍주는 서로를 일본인이라 생각했다가 비슷한 처지의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의기투합했다. 김홍주는 제주에 최고의 골프장과 타운하우스 단지를 만들고자 했다.

우선 골프 코스는 ‘가장 혁신적인 골프 코스 건축가’로 불리는 테오도르 로빈슨에게 맡겼다. 국내 최초로 ‘세계 100대 골프장’으로 꼽힌 바로 그 핀크스 골프클럽이다. ‘핀크스(Pinx)’는 라틴어로 ‘그림을 그리다’ 혹은 ‘작품을 완성하다’라는 뜻. 이름의 뜻 그대로 김홍주는 한라산 중산간에 건축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런 꿈을 실현해준 이가 바로 이타미다. 이타미는 2001년 포도호텔을, 그리고 2005년에 비오토피아를 완성했고 2007년에는 비오토피아 단지 안에 연작인 수·풍·석박물관을 들여놓았다. 비오토피아 입주자인 한 중견기업 대표가 사비를 털어 의뢰한 방주교회도 이타미가 인근에다 2009년 완공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타미의 여러 건축물이 제주의 한라산 중산간에 자리 잡게 된 연유다.

▲  비오토피아에서 만날 수 있는 이타미 준의 바람 박물관. 적송으로 만든 널을 붙여서 만든 건물인데, 널과 널 사이의 틈으로 제주의 바람이 지나며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바람 박물관이다. 형체가 없는 바람을 건축이 소리로 바꾸어 내는 셈이다.

# 물과 바람과 돌… 건축이 예술이 되다

포도호텔은 이타미의 건축적 특징인 ‘자연과의 조화’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그가 200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상한 것도 이 호텔을 대표작으로 평가받은 결과였다. 호텔은 제주의 전통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모티브 삼아 지은 26개 객실의 단층 건물이다. 초가지붕이 처마를 잇대고 있는 듯한 형태가 포도송이와 비슷하다고 해 호텔 이름도 포도호텔이 됐다. 호텔의 건축을 관통하는 모티브는 ‘열림과 닫힘’이다. 출입구의 구조물도, 긴 복도도, 모두 열림과 닫힘으로 해석된다. 인상적인 것은 호텔 안쪽에 원통형의 유리 안에 들여놓은 실내정원. 하늘이 열려있어 빛을 끌어들이는 정원은 밖이기도 하고, 안이기도 하다. 실내정원의 물이 자연스럽게 호텔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한다. 전체의 형태가 잘 짐작되지 않는 흥미로운 구조도 인상적이고, 번들거리는 검은 바닥 돌을 보조 조명으로 활용하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이타미가 추구해온 ‘예술로서의 건축’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최고급 거주단지 비오토피아에 있는 수·풍·석박물관이다. 거주단지 공용공간에 박물관을 지으려 구상 중이던 김홍주에게 이타미는 독특한 제안을 한다.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 건축물 자체가 오브제가 되는 자연박물관을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제주를 대표하는 물·바람·돌을 주제로 한 박물관이 지어지게 됐다.

박물관은 울타리를 둘러친 거주단지 안에 있으니 개별적으로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비오토피아 거주민 자치조직에서 하루 두 차례, 오전과 오후 각각 25명의 예약 관람객만 받아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1시간짜리 투어를 운영해왔다. 관람 예약은 쉽지 않다. 3개월 이후 관람분까지 예약을 열어놓는데, 웬만해서는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3개월 동안 관람이 중단됐던데다, 관람을 재개하면서 ‘거리 두기’를 적용해 회당 25명이던 관람객 수를 14명으로 줄이면서 예약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주민들이 거주단지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던 때에 비하면, 관람료 2만 원을 내고 이렇게나마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게 황송할 따름이다.

수·풍·석박물관에서는 이타미가 자연을 어떻게 건축 안에 담아내는지, 제주의 지역성과 지형, 기후를 어떻게 소화해 내는지, 공간이 가지고 있는 무늬를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살필 수 있다. 그의 건축은 공간을 뛰어넘는다. 놀라운 건 건축물에 시간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그는 완공 후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에 따라 변하는 모습까지 상상해서 건축물을 지었다.


# 건축이 세월과 시간을 보여주다

▲  비오토피아 인근의 본태박물관. 안도 다다오가 건축했다. ㄱ자 모양의 두 개 건축물 사이에 관람자의 동선을 이끄는 한국식 기와 담이 있다. 뒤쪽 건물은 나중에 증축된 것이다.
수·풍·석박물관 투어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 돌 박물관이다. 예닐곱 평이나 될까. 박물관은 철판으로 만든 직육면체 상자와도 같다. 돌 박물관이라면서 왜 주재료가 철일까. 따지고 보니 철도 결국 돌(철광석)에서 온 것이 아닌가. 본래 노란색이었다는 박물관 외벽 철판은 비와 바람으로 붉게 녹슬었다. 지을 때부터 붉은 녹이 벽의 색을 바꿔놓을 것임을 의도했다. 붉은 녹이 보여주는 건 ‘굵게 썰어낸 시간’이다. 벽과 지붕이 만나는 모서리에 하트모양의 작은 창이 있는데,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해의 높이에 따라 자리와 모양이 바뀌다가 정오쯤 작품인 검은 돌 위로 올라선다. 햇볕의 움직임으로 보여주는 것은 ‘잘게 자른 시간’이다. 크고 작게 썰어낸 시간은 ‘변화’로 드러난다. 변화는 살아있다는 증거. 차가운 철과 단단한 돌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건축가의 능력이 놀랍다.

▲  이타미 준의 돌 박물관. 전시공간이 아니라 스스로가 예술작품으로 붉게 녹슨 철제 직육면체 건축물이다. 지붕과 벽이 만나는 부분의 하트모양 창으로 들어온 빛이 태양의 고도에 따라 움직이다가 정오쯤 검은 돌을 비춘다.
바람박물관은 마치 마구간처럼 보인다. 적송으로 지어서 건축물 전체가 붉은색이었다는데, 바깥쪽은 갈색으로, 안쪽은 푸른 기운이 도는 회색으로 탈색돼 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 나무 널을 세로로 켜서 붙였는데 널 사이사이에는 작은 틈을 두었다. 밖에서는 그 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빛이 들어오는 틈이 선명하다. 안에 서면 그곳이 왜 바람박물관인지 금세 알게 된다. 한라산 중산간의 바람이 벽체의 널과 널 사이를 통과하면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을, 건축가는 이렇게 소리로 잡아내 들려준다. 널의 틈을 통과하는 건 바람뿐만이 아니다. 맑고 화창한 날이면 널의 틈이 바닥에 환상적인 빗살무늬를 그려낸다.

세 개의 박물관 모두가 영성적인 느낌의 공간이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물 박물관은 그런 느낌이 더하다. 전체적으로 둥근 건축물 안 사각형의 공간에 물을 얕게 채우고는 하늘을 둥글게 열어놓았다. 어두운 색의 자갈을 깔고 물을 채운 사각형의 수조는 거울이 돼 하늘을 그대로 비춰내고, 빛을 받은 수면이 거울처럼 벽면에 반사돼 무늬를 그린다. 직관적인 느낌의 공간이어서 이곳에서는 어떤 설명이 없어도 좋다.

제주에 있는 이타미의 건축물 중에서 관광객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방주교회’다. 구약의 ‘노아의 방주’를 닮았다는 교회의 외관이 워낙 인상적인 데다, 예약 없이 누구나 격의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서 한 해 20만∼30만 명의 관광객이 이 교회를 찾는다. 물을 받아놓고 그 위에 올라선 배 모양의 건물은 저 아래 산방산을 바라보고 있다. 장엄과 권위로 하늘 높이 치솟은 다른 교회에다 대면, 옷깃을 여민 듯 단정하게 반짝이는 이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안도 다다오, 마리오 보타 그리고 김중업

이타미의 건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사실 건축가로서의 대중적인 명성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앞선다.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은 뒤로 안도는 현대건축의 거장으로 불린다. 제주에는 안도의 건축물이 세 개 있다. 섭지코지의 유민미술관(지니어스 로사이)과 글라스 하우스, 그리고 비오토피아 인근의 본태박물관이다.

이중 인상적인 것이 지금은 유민미술관이 된 ‘지니어스 로사이’다. 지니어스 로사이란 라틴어로 ‘지역의 수호신’을 뜻하는 단어. 명상공간이란 목적으로 지은 이 건물은, 서양 건축의 기하학적인 형태에다 일본식 건축의 특징인 복잡한 출입 동선을 결합하는 안도의 건축적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건축물이다. 그의 건축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 일부러 에둘러 돌아가도록 동선을 길고 복잡하게 내는 것이다. 금세 갈 수 있는 길을 복잡하게 접어 도착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한정된 공간을 넓게 쓰곤 한다. 지니어스 로사이도 길이 빙빙 돌면서 각도에 따라 다른 경관을 생경하게 보여준다.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명상공간’이란 개념이 낯설었기 때문이었을까. 지니어스 로사이는 2017년 프랑스 아르누보 유리공예 작품을 전시하는 유민미술관이 됐다.

지니어스 로사이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갈수록 낮아지는 형태의 건물이다. 복잡한 장식과 재료를 배제한 채 구조체인 뼈대와 콘크리트 벽으로만 이뤄져 있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구조물의 형태뿐만 아니라 건물 안에 들어선 이의 시선, 그리고 안으로 스미는 빛까지 합세해 안도의 건축이 완성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지니어스 로사이의 건축적 완성도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지만, 우도가 바라다보이는 바다 쪽으로 몇 발짝 더 나가 건축한 글라스 하우스는 그 가치를 놓고 논란이 좀 있다. 노출 콘크리트 받침에다 상자 형태의 유리 건축물을 V자로 벌려 바다를 향해 앉혀놓았는데 기하학적인 외양이 현대적이라는 호평도 있고, 날카로운 직선의 건축물이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한라산 중산간에도 안도의 건축물인 본태박물관이 있다. 건축적 특징만으로도 안도의 설계라는 게 대번에 느껴지는 건축이다. 정방형의 노출 콘크리트로 지은 두 개의 건물이 담장으로 구분되고 그 사이로 물이 흘러내리는 벽이 세워진, 가는 골목이 이어진다. 특이한 건 긴 담장이 안도의 건축물에서 한 번도 쓰이지 않은 한국 전통의 기와 담이라는 것. 그는 ‘현대미술과 한국 전통의 조화’라는 건축주의 숙제를 이렇게 풀었다.

이타미와 안도 외에도 제주에는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있다. 섭지코지에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 ‘아고라’가 있고, 구좌읍에는 루이 비통 본사를 설계한 프랑스의 장자크 오리에게 자문해 지은 거대한 독수리 형상의 세인트포 골프장 클럽하우스가 있다. 해외 건축가뿐만 아니다.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중업이 지은 독특한 외양의 ‘소라의 성’ 건물도 있고, ‘감응의 건축가’로 불리는 건축가 정기용이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지은 두 곳의 도서관도 있다.

“굳이 제주까지 가서 무슨 건축이냐”는 질문은, 이런 거장의 건축물 앞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게 된다.

제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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