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여담>‘삐라’ 전쟁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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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운 논설위원

삐라(ビラ)는 전단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어원은 불분명하다. 종이 고지서를 뜻하는 영어 bill의 일본식 발음인 ‘비루’가 변한 말, 조각을 의미하는 히라(片)에서 파생된 말, 의태어 비라비라(펄럭펄럭)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해석 등이 있다. 찌라시(チラシ)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는데, 상대적으로 삐라는 정치적 선전물을 지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삐라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찌라시는 요리,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일본에 삐라가 본격 등장한 것은 태평양전쟁 당시다. 미군은 일본 폭격 전 대규모로 전단을 살포했다. 민간인의 살상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미군이 미리 알려주고 폭격해도 일본군은 막을 수 없다는 심리전 성격도 있었다. 미군은 6·25를 거쳐 2001년 아프가니스탄·2003년 이라크 전쟁 등 현대전에서도 똑같은 심리전을 적용했다.

6·25 당시 미군의 ‘삐라전’은 절정에 달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북 장병에게 안전과 음식, 치료 등 좋은 대우를 보장한다는 삐라를 대량 살포해 귀순을 유도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에게 항복한 북한군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라는 명령을 담은 ‘안전보장증명서’도 뿌렸다. 북한군과 중공군을 이간질하는 내용도 있었다. 중공군이 좋은 무기는 모두 차지하고, 못 쓸 무기만 북한군에 준다는 것.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배운 삐라전을 남한 주민에 대한 선전·선동전에 이용했다. 월북하는 국군 장병에게 대학 교육, 직업 알선, 외국 유학, 고급 주택을 보장하고 최고 185억 원까지 준다는 내용도 있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남한에서는 북한 삐라에 속아 월북한 주민들도 있었고 남한 정부는 엄격하게 삐라를 단속했다. 북한은 최근까지도 삐라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효과는 떨어졌다. 이미 남과 북의 생활 수준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조악한 선전·선동이 먹힐 수가 없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탈북한 남한 주민들이 역으로 북한에 전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외부의 정보가 체제를 흔드는 위험 요소가 된다. 북 당국이 강력히 반발하는 이유다. 북 당국은 탈북민 전단 살포에 맞서 또다시 대규모 삐라전을 벌인다고 한다. 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