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치권 기본소득 論爭은 허깨비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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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협 경제부장

현실을 도외시한 이미지 정치
票만 쳐다보다 경제이슈 굴절
보수·진보 모두 착시로 논쟁 중

복지서비스 돈으로 해결 못 해
財政 파탄 초래할 보편성 대신
시스템 정교화·구조조정 시급

기본소득(Basic Income·BI) 논쟁의 최대 우려 지점은 바로 진정성이다. 일을 하든 않든, 재산이 얼마든, 모든 국민 개개인에게 일정액을 무조건 소득으로 준다니 싫어할 국민은 없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논의의 끝이 어딜지 예측 가능한데도 논쟁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다음 대선인 2022년 봄까지는 더 가열하게 전개될 전망이다. 논의의 기본 출발이 경제가 아닌 정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채로운 대목은, 보수가 진보의 의제를 적극 주창한다는 점이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15 총선 참패 직후 BI 전도사를 자임한 시점도 공교롭다. 중도의 외연을 확대한다는 거대한 정치 포석일 수 있다. 그래도 의구심은 남는다. 왜 하필 지리멸렬 소모적 논쟁으로 막 내릴지도 모를 의제를 택했는가. 선한 의지에서 해보려 했는데 현실이 안 되니 거둘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발뺌하는 진보의 행태를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잖아도 이재명 경기지사는 보편적 복지를 내걸고 지지층 결집을 꾀하려는 전략을 펼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결단을 요구받을 때 보수든, 진보든 진짜 실행에 옮기지 못할 의제라는 점에서 거둘 수 있는 효과는 딱 거기까지다. 경제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 정치일 뿐이다.

경제 이슈를 표(票)에 함몰돼 바라보면 왜곡된 모습만 본다. 착시 현상이다. 아니라면 필요한 돈을 어디서 끌어오겠다, 기존 복지 중 무엇을 포기하겠다 등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기본소득지구연맹(Basic Income Earth Network)은 BI 특징으로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충분성, 정기적, 현금급여 등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이에 맞춰 5200만 명에게 1인당 매월 10만 원의 BI 지급을 계산하면 어림잡아 1년에 62조 원이 필요하다. 30만 원을 준다면 187조 원, 60만 원이라면 374조 원, 80만 원의 경우 499조 원을 정부가 조달해야 한다.

2019년 보건복지예산은 162조 원이니 이를 전부 포기하고, 다른 정부지출 항목을 좀 줄인다면 한 달 30만 원, 1년 360만 원씩 손에 쥘 수도 있겠다. 이렇게 기왕에 국가가 수행해오던 복지 시스템, 기초연금·생계급여·아동수당·근로장려금 등등 모든 복지정책을 포기하고, 개인이 알아서 한 달에 30만 원으로 비슷한 수준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선별적 복지에 따라 기초연금 대상자는 한 달에 최대 30만 원을 받는데 기본소득으로 전환해봐야 실상은 달라질 게 없다. 그리고 부자에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요양원 확산과 관련돼 논의된 대책 중에는 시설을 폐쇄하고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일정액을 현금으로 지원하는 내용이 거론된 바 있다. 불가피하게 요양원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환자와 가족에게 한 달에 몇십만 원 준다고 집에서 요양서비스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돈이 아니라 해당 서비스가 필요하다.

각각의 복지 서비스가 반드시 바로 그 서비스의 형태로 지원되지 않는 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기존 복지를 포기하지 않는 대신 누가 봐도 매우 충분할 정도로 BI를 지급하기 위해서는 대폭 증세가 불가피하다. 특정 계층에 가혹한 누진율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보통사람은 결국 세금을 더 낸 만큼 돌려받는 식이라 제로섬 게임으로 그친다. 불평등은 해소되지도 않고 재분배 효과도 없다. 오히려 분배 역진성이 더 클 것이다.

BI는 긴급재난지원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코로나19 비상 경제 상황에서 소비촉진과 내수진작을 통해 자영업·소상공인을 살리자는 긴급처방식의 효과를 BI에 기대하긴 힘들다. 보편성의 함정도 이 기회에 다시 봐야 한다. 권성준 한국조세재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이 최근 ‘재정포럼’(2020년 6월)에서 분석한 ‘정부이전지출 확대에 따른 가구의 소비지출 행태 분석’ 보고서에는 양육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충분한 고소득층에까지 보육료(만 0∼2세)와 유치원비(만 5세)를 지원하는 정책은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통합당이 BI를 외친 덕택인지 중도층 지지율은 다소 오른 모양이다. 반면, 보수에서는 소폭 줄었다. 한계는 분명하다. 정치권과 정부는 허깨비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구상할 시간에 선별적 복지 혜택을 확대하거나 중첩된 현금복지를 구조조정하고 누수를 방지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